과학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증거를 찾는 '한국의 CSI'
창설 60주년 맞는 동안 삼풍백화점·세월호 참사 등 굵직한 사건들 해결 도맡아
작년 감정처리 34만8117건 말聯에 1억원 시스템 수출도
창설 60주년 맞는 동안 삼풍백화점·세월호 참사 등 굵직한 사건들 해결 도맡아
작년 감정처리 34만8117건 말聯에 1억원 시스템 수출도
"몸은 연구원에 있지만 마음은 현장에" 타액 한방울·미세 흔적 하나도 소홀히 할수 없는 증거 마약독성과 필로폰투약 의뢰 하루에만 14~15건… 48시간내 음·양성 판정하려면 1분1초가 빠듯 혈액·정액서 DNA 찾아내는 유전자분석과 연구원들 에이즈·결핵 감염위험 항상 노출돼 있어
#. 지난 3월 사회를 경악케 한 '포천 제초제 연쇄살인 사건'. 40대 여성 노모씨는 2011년부터 제초제를 탄 음료와 음식을 먹게 하는 수법으로 전 남편과 현재 남편, 시어머니 등 3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의 친딸도 제초제가 들어간 음식을 지속적으로 먹다 병원신세를 졌다. 폐 질환 사망으로 둔갑될 뻔한 이 사건은 경찰 수사 결과 거액의 보험금을 노린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노씨는 지난달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약독물 분석 결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피해자가 사망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고 제초제를 조금씩 섞어 먹였기 때문에 성분 검출이 쉽지 않았다. 경찰 수사가 시작된 후 국과수는 매장된 지 2년된 시어머니 유해를 거둬 부검했다. 입원한 딸에게서는 폐 조직 검사과정에서 채취하다 남은 폐조직과 혈액시료를 분석했고 노씨 집에 있던 반찬 통도 분석했다. 1개월 가량의 극미량 분석을 거쳐 나노그램(1ng=0.000000001g) 단위의 농약을 검출, 경찰 수사는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이처럼 국과수는 범죄수사에 대한 법의학.법과학.이공학.유전자감식 분야 등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실시한다. 국과수 감정서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의자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강력한 근거로 종종 제시된다. 파이낸셜뉴스는 행정자치부 소속 감정.연구기관인 국과수 업무 현장을 함께 했다.
■사건과 함께 움직여… 상시 대기
"엄마에게 딸이 아니라 아빠가 건넸나요? 남편과 아내 사이는 평소에 좋은 관계였나요? 남편의 직업은 뭐죠?"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신월동에 위치한 서울과학수사연구소를 찾았다. 2층 마약독성화학과 사무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승경 마약독성화학과장(51.여)은 약독물 분석을 의뢰받은 사건에 대해 담당 수사관에게 꼼꼼히 캐물었다. 경찰에서 들어오는 형사 사건이 95%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아 사건 전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분석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마약독성화학과는 변사체 등의 생체시료에서 의약품, 독극물, 농약, 천연독 및 부정식의약품 등에 대한 유해성 감정과 미세증거물 등 법화학적 감정과 연구를 맡고 있다.
인체 부검 시료가 약독물실로 오면 부검 적출물, 즉 위 내용물, 혈액, 장기 조직, 안구액, 뇌척수액 등을 토대로 농약과 약물 투약 여부 등을 분석한다. 약물이 검출됐다면 치료 농도인지, 독성 농도인지, 사망에 이를 정도인 치사 농도인지도 구별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지 않고 판매.유통되는 발기부전치료제와 같은 부정의약품도 감정 대상이다.
연구원에 몸담고 있지만 사건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시간에 늘 쫓길 수밖에 없다. 마약 사건의 경우 경찰이 피의자를 긴급체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하는 48시간 내에 마약 음·양성을 판정해야 한다. 서울.경기.인천에서 들어오는 사건은 전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상황이다.
백 과장은 "경찰 수사관은 3교대를 하는데 국과수는 그럴 인력이 부족하다"며 "각 과에서 순번대기조를 편성해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약독성화학과 내에서 약독물실과 마약실 직원은 모두 약사 출신이다. 마약독성화학과의 한 직원은 "약사로 약국에서 근무한다면 처방에 따른 조제만 하게 되겠지만 경찰이나 검찰 수사관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성폭력 상담기관에 자문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며 "필로폰 투약 의뢰 건은 2006년 1일 평균 3~4건 정도였다가 올해 14~15건으로 늘었다. 마약류 남용 예방대책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술을 잘 마시는 편인데 술을 마시다 쓰러져 이상했다'며 의뢰가 들어왔는데, 상대방이 약을 탄 게 아니라 살 빼는 약을 남용하거나 감기약 복약 지시를 어겨 부작용이 생긴 경우도 있었다"며 약물 오남용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타액 한방울, 미세흔적… 모두 주요 증거
유전자분석과가 있는 본관 옆 별관동으로 향했다. 유전자분석과는 범죄현장에서 확보한 DNA의 신원을 확인하고 채취대상자(구속된 피의자)의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운영하는 일을 한다.
건물은 '증거물 보관→증거물 시료 채취→DNA 분리→데이터 분석' 네 가지 절차에 따라 층수가 배정돼 있었다. 2층에서 증거물에 묻은 타액, 혈흔, 정액 등을 채취하고 3층에서 개인 식별을 위해 DNA를 분리.증폭하는 식이다.
2층 채취실에 들어서니 찬 기운이 확 느껴졌다. 채취를 앞둔 각종 증거물이 플라스틱 보관함이나 실린더에 담겨 냉장보관돼 있었다.
김양정 유전자분석과 실장(41.여)은 "세포와 같은 생물학적 증거는 썩어서 보존되기 어렵기 때문에 증거물을 잘 건조시켜야 한다"며 "여성의 질액은 냉장보관한 뒤 DNA를 추출한다"고 설명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DNA를 다루다보니 감염의 위험성도 따른다.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 감염자의 것일 수도, 결핵 환자의 것일 수도 있다. 김 실장은 "사건 현장에서 들어오는 미지의 샘플을 다루면서 자신도 보호해야 한다"며 "증거물 보존과 오염 방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전자증폭기를 쉼 없이 다루던 한 연구원은 "부지런히 팔을 움직여야 하는 직업"이라며 "팔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오후 4시가 넘어 이공학과가 있는 옆 동에 사복 차림의 한 연구원이 들어왔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돌아왔다는 그는 "교통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감정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올해 10년차라는 그는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방호복을 입고 망치를 두드리는 일"이라며 "겉으로만 보면 사고 원인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부품을 분해한다"고 전했다. 실제 이곳에는 사고 차량을 직접 가져와 분석할 수 있도록 카센터와 흡사한 구조의 분석 장소가 마련돼 있다.
이공학과는 화재 사건도 중점적으로 맡고 있다. 경찰청 의뢰를 받아 직원 3~4명이 한 팀이 돼 현장으로 출동한다.
이기태 이공학과장(48)은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 우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어떻게 불이 번져나갔을지를 추정한다"며 "전선의 특이점, 폐쇄회로(CC)TV, 보안장치 등을 토대로 발화지점을 알아낸 후 불이 나기 전 상태를 복원한다"고 밝혔다. 이 과장은 "크기가 작은 증거물은 현미경이나 엑스레이를 동원해 관찰한다"며 "주요 사건에 대해서는 재현실험이나 시뮬레이션을 시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60돌… '과학수사 한류'로 나아가다
국과수는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년), 대구 지하철 참사(2003년), 인도네시아 쓰나미(2004년), 서래마을 영아유기 사건(2006년), 불법조업 단속 해양경찰관 살해사건(2012년), 세월호 참사(2014년) 등 굵직한 사건들이 국과수를 거쳐갔다.
60년 전 한 해 480건에 불과하던 국과수 감정처리는 어느새 725배까지 증가했다. 2012년 29만8729건, 2013년 33만5009건, 지난해 34만8117건을 기록하는 등 꾸준히 느는 추세다.
감정 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국과수는 지난해 과학수사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과학수사학술대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지난해에는 말레이시아에 1억원 상당의 국과수 시스템을 처음으로 수출했다.
최영식 서울과학수사연구소장은 "이제는 국과수를 사법체계의 마지막 보루로 보는 인식도 생겼더라"며 "달라진 위상을 실감한다"고 했다. 최 소장은 1991년 법의관으로 국과수에 발을 들였다.
최 소장은 "사건 현장에서 유가족이 '국가에서 왔다'고 하면 배척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행자부 소속이지만 우리를 통해 유가족들이 행정기관과 소통하려 할 때도 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다만 경제적 여건은 아직 미흡한 상황이다. 그도 그럴것이 국과수는 장기간 지방 출장이나 해외 출장시 체류비와 비행기 삯의 대부분을 기존 예산으로 충당한다. 정부에서 예산과 인력을 충분히 지원받는 게 최 소장의 바람이다. hiaram@fnnews.com 신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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