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명에 불과한 새벽 조깅 멤버이자 김 전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인간적으로 따랐던 박 전 의원의 슬픔은 조문기간에 흩뿌렸던 빗방울처럼 구슬펐고, 더욱 깊었다.
영결식이 열리는 26일 새벽까지 분향소를 지켰던 박 전 의원은 2일 전화통화에서 "고인을 마지막 배웅하는 내내 군정종식, 문민정부, 금융실명제, 5공 청산, 세계화 등 굵직굵직한 개혁을 거침없이 주도했던 지도자, 젊은 비서관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고 자상하게 가르쳐주던 따뜻한 아버지같은 지도자상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갔다"고 전했다.
아직은 이른 새벽시간대임에도 생전에 김 전 대통령이 단골로 이용했던 시내 한 식당의 주차관리인이였던 한 남성이 홀로 분향소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북적이는 조문객을 피해 왕래가 뜸한 새벽 시간대에 조용히 분향소를 찾아 생전의 김 전 대통령 모습을 떠올리며 고인과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택시운행을 마치고 귀가하던 50대 남성을 비롯해 식당 영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던 중년의 여성 등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고인의 마지막 배웅길에 함께 했다.
박 전 의원은 상주없는 서울시청 분향소에서 거제도산(産) 멸치를 먹으면서 고인과의 인연을 되새김질하며 추억의 한 페이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박 전 의원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1년에 한 번씩 추석 명절때마다 선물로 참모진들에게 거제도 산 멸치를 선물로 주곤했는데 고인이 된 지금 김 전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청빈과 소탈함을 대변하던 멸치를 먹으면서 오로지 국민을 위해 치열하게 일했던 청와대 생활을 곱씹기도 했다.
박 전 의원은 "칼국수를 그리 즐겨드셨는지를 생각해보면 부친께서 멸치잡이배 10척을 밤새 몰아 정치적 뒷바라지를 한 성공한 대통령 자식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 김 전 대통령은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자연스럽게 당시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잊고 있었던 각종 에피소드가 어느새 선명한 화면으로 박 전 의원의 머릿속을 채웠다.
김 전 대통령은 칠레 순방 당시 시차극복을 위해 현지 새벽시간대도 참모진들과 여지없이 새벽 조깅을 즐겼다고 한다.
하루는 칠레 육군사관학교 여생도들이 조깅 대열에 함께했는데 빠른 속도로 조깅을 하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을 보고 여 생도들이 "와 대통령님 40대 같으십니다"라고 감탄(?)했다는 말을 전해드리자 김 전 대통령은 뒤를 돌아보며 "체력은 20대라 케라"하는 바람에 모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청와대에서 나와 미국 뉴욕대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인사차 찾은 박 전 의원에게 김 전 대통령은 '금일봉'을 선뜻 내놓으면서 "유학생활 힘들낀데 보태쓰라"고 해 박 전 의원은 대통령의 호의를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일단 받아들고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얼핏보니 5000달러 남짓되는 큰 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인사차 김 전 대통령을 접견한 박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청빈과 소탈한 생활때문에 금일봉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돌려드리기 위해 갖고 왔다고 보고하자 김 전 대통령은 한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박 전 의원을 바라보고는 '알았다'는 표정으로 서랍안에 넣었다고 한다.
2006년 박 전 의원이 3선 도전을 위해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서울 종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맞붙었을 당시, 박 전 의원은 한 식구처럼 존경했던 손 대표와의 일전이 심적으로 고통스러웠다.
손 대표는 문민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발탁하고 경기 광명지역에 공천을 줄 만큼 김 전 대통령의 신임이 매우 두터운, 말 그대로 '잘 나가는' 여권내 차세대주자였지만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후 '정치1번지'인 종로에서 박 전 의원과 일전을 펼친 것.
한 때는 유학생활도 같이한 서로 존경하는 선·후배사이였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면으로 맞붙은 두사람에겐 정말 얄궂은 운명이었던 것이다.
박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사자가 토끼를 잡을때처럼 최선을 다해 전력투구해서 반드시 선거에서 이기고 오겠습니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이 말은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언급하는 언사 중 하나로 평소 참모진들에게 "비록 아무리 약해보이는 토끼지만 절대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이길 수 있다"며 몸가짐을 분명히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김 전 대통령은 "손학규는 토끼가 아닌데…"라고 했다는 게 박 전 의원의 전언이다.
haeneni@fnnews.com 정인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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