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또 한 해가 시작된다. 지난 한 해는 참 일도 많았다. 사회 각 분야의 모든 이들이 전력 질주를 했던 해였다. 정치나 경제, 사회 여러 부문에서 누구 할 것 없이 모두들 고생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우리 사회는 그동안 고질적인 병폐의 하나였던 상호 적대적인 이분법적 갈등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처럼 전력 질주하는 것이 더 문제인 사회가 되었다. 이젠 누군가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전력 질주에 몰입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가 내가 무엇을 위해 달려가려 했던가 하는 그 목표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것 같다는 데에 있다. 아마도 사회가 경제적으로 단단하게 경색되어 있다 보니 일단 그 막힌 길을 뚫는 데만 급급해 버린 결과 애초의 목표의식은 사라지고 막막한 질주만이 남아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방향 상실과 전력 질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과 초조를 불러온다. 현실이 막막할 때 그의 불안과 초조의 질주는 자아의 외부보다는 점점 더 '무결점의 자아'를 상상하는 쪽으로 빠져버리게 된다.
불안과 초조로 꿈꾸는 세계가 바로 이상적인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삶의 행태가 타인과 단절된 상태로 나르시시즘적인 성격으로 강하게 경도되고 있다는 의미도 되겠다. 말하자면 그들은 타인과 의미있게 교류하려는 정신적인 여유를 상실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만큼 세상은 각박해 타인을 거들떠볼 겨를이 전혀 없게 되었던 것이리라. 그는 더 많은 스펙을 쌓아야 하고 더 많은 정보를 입수해야 하며 더 많은 성과를 이뤄내야만 한다. 자신이 원하는 자신에 '자기 주도적으로' '완전히' 도달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의 전쟁에서 실패하게 될 때,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갇혀 우울증에 빠지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겪고 소진증후군과 같은 병리학적 현상에 시달린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이러한 주체를 과거의 면역학적 주체와 구별해 병리학적 주체라 명명하고 있다. 외부 바이러스가 침투해 내부를 교란하는 사회를 면역학적 사회라 한다면 외부의 적과 관계없이 사회 내부에서 더 많은 성과를 이루려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의 사회를 병리학적 사회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 성과에만 집착해 타자와 분리되어 개별화하고 고립되며 하나의 성과기계가 되어 극단적 피로와 탈진상태, 나아가 각종 병적 증세를 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우울한 현실로부터 해방될 길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고립감과 과도한 자학, 그로부터 발생하는 여러 병리적인 현상으로부터 벗어나 진정 활기차게 살아갈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병철은 그에 대한 몇 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 주목을 끄는 요소는 단연 타인에 대한 개방적 자세다. 그는 너무나 공고해진 자아의 조임쇠를 조금 느슨하게 함으로써 타자가 들어올 틈새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대해진 자아를 축소하고 그 자리에 세계의 비중을 높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너무 자기 안에 과도하게 고립되어 있는 것 같다. 새해에는 밖을 향해 자기 '마음의 감옥' 문을 조금씩 열었으면 좋겠다.
김진기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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