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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인디언을 찾아서] (11)샌드크리크 대학살,'연극' 꾸며 인디언 안심시켜 놓고...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14 17:00

수정 2016.01.15 01:35

시빙턴 대령, 병력 이끌고 대학살.. 새벽에 인디언 캠프 공격
남자들은 대부분 사냥 나가 부녀자·아이 100여명 사망
시빙턴 '영웅 대접' 받았지만 학살 증언 잇따라 진실 밝혀져
샌드크리크 대학살을 묘사한 미국 화가 로버트 린드너의 그림.
샌드크리크 대학살을 묘사한 미국 화가 로버트 린드너의 그림.

■콜로라도 로키산맥에서도 금광 발견
1858년 콜로라도 로키산맥 파이크스 피크에서 금이 발견됐다.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당시에 '포티나이너(49ers)'라는 말이 생겨났듯이 '피프티나이너(59ers)'로 불렸던 금을 캐러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콜로라도에서는 덴버와 볼더시티와 같은 붐타운이 생겨났다.

미네소타에 있던 산티 수우족이 미군에 맞서 싸우다가 1862년 12월 26일 38명이 사형당한 일을 이미 들어서 아는 터라 미군과 접촉을 피하기 위해 샤이엔족 인디언은 백인이 많이 다니는 지역에서는 들소 사냥을 자제했다. 1863년에는 두 추장, 검은 주전자와 살 빠진 곰이 워싱턴으로 초청돼 링컨 대통령도 만나고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훈장도 받고 미국 국기인 대형 성조기도 선물로 받았다.
이 성조기 깃발이 휘날리게 걸어두면 어느 누구도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1864년에는 백인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추장들이 에번스 콜로라도 주지사를 만나러 덴버까지 갔다. 처음에 에번스는 인디언 대표와의 면담을 거절했다. 인디언과 동행했던 윈쿱 소령이 간청하자 마지못해 주지사는 추장들을 만나주었다. 그러나 주지사는 콜로라도 안에 있는 인디언들을 소탕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북쪽의 수우족이 한 일에 대해서 생트집을 잡는 등 인디언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고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콜로라도의 리용 요새 책임자였던 윈쿱 소령은 1864년 11월 인디언에 대해 너무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캔자스의 가일리 요새로 쫓겨 가고 앤소니 소령이 그 자리에 임명됐다.

■에번스-시빙턴-앤소니의 샌드크리크 대학살

인디언에 대한 공격은 시빙턴 대령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감리교 목사 출신이다. 그는 공공연히 인디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으며 샌드크리크 대학살 현장으로 떠나기 직전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인디언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말했다. 샌드크리크 학살 이듬해인 1865년에는 그의 아들 토마스가 물에 빠져 죽자 며느리를 꾀어서 결혼까지 하고 1871년 이혼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법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임에는 틀림없다.

시빙턴 대령의 충복인 앤소니 소령은 대학살극의 조연 역할을 너무나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 참극의 기획은 에번스 주지사 그리고 주연은 시빙턴으로 볼 수 있다. 앤소니 소령은 요새에 있던 상인들을 인디언 캠프로 보내는 등 인디언들이 안심하고 한곳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 연극을 꾸미기도 했다.

세상에는 어떤 경우에도 의인이 있게 마련이다. 시빙턴의 말도 안 되는 인디언 학살 명령에 정면으로 저항한 세 명의 장교가 있었다. 소울 대위, 크레이머 중위 그리고 코너 중위가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본인은 물론이고 부하들에게도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후에 진상조사위원회에 출석해 그날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런데 이 중 소울 대위는 후일 시빙턴을 추종하는 한 백인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1864년 11월 28일 밤 8시 시빙턴은 앤소니 소령 부대를 포함해 약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학살 현장을 향했다. 공격은 이튿날 새벽 일제히 시작됐다. 깊은 잠에 들어 있던 인디언 캠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검은 주전자는 그의 천막에 워싱턴 방문 시 받아온 성조기를 매달아 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워싱턴에서 들었듯이 성조기가 걸려 있는 한 미군이 공격하지 않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많은 인디언이 빗발치는 총알 세례를 피해 검은 주전자의 티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빙턴의 군대는 성조기 깃발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왔기 때문에 검은 주전자의 천막으로 피신했던 사람들도 황급히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샌드크리크에는 약 600명의 인디언이 머물고 있었는데 남부 샤이엔족이 대부분이었고 니워트 추장을 포함한 아라파호족이 약간 섞여 있었다. 이날 젊은 남자들은 거의 다 사냥을 나갔기 때문에 부녀자와 어린아이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광란의 살인극으로 인해 남자 28명을 포함해 133명의 인디언이 사망했다. 이런 종류의 대량 학살은 특정인종을 제거할 목적으로 자행되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현재의 콜로라도주 지도를 보면 인디언보호구역은 애리조나주 접경에 약간 있을 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백인들이 샌드크리크 대학살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대학살에 대한 관계자의 증언

참극의 실상이 정확하게 알려지기 전까지는 일시적으로 이 사건을 정당한 전쟁행위로 잘못 알고 시빙턴을 인디언 전쟁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날 있었던 대학살에 대해 여러 사람이 증언함으로써 진상이 하나씩 드러났다. 시빙턴에게 정면으로 항명했던 세 명의 장교도 후일 군 조사기구와 연방의회의 진상조사위원회에 출석, 세세히 진실을 털어놓았다. 이때 윈쿱 소령은 군 조사기구 책임자로 활동했다. 증언에 의하면 인디언들을 사살한 후에도 시신에다 몹쓸 짓들을 저질렀다고 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시신에서 성기를 도려내 무슨 전리품인 양 가져갔다. 어떤 미군은 남자의 성기를 담배쌈지로 쓰겠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기도 하고 또 다른 미군은 여성의 성기를 막대기에 걸어 전시하겠다고 큰소리치기도 했다고 한다.
증언자들은 또한 실제로 많은 병사들이 여성의 성기를 도려내어 말안장에 걸치거나 모자에 장식품으로 꼽고 다녔다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들은 덴버의 아폴로극장이나 그 지역의 술집 같은 곳에 이런 볼썽사나운 전리품들을 공개적으로 전시해 두었다고 한다.
소울 대위가 윈쿱 소령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임신한 여성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끄집어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아메리칸 인디언을 찾아서] (11)샌드크리크 대학살,'연극' 꾸며 인디언 안심시켜 놓고...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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