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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인디언을 찾아서](13) 라코타의 성산 블랙힐즈를 지켜라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28 16:59

수정 2016.01.28 20:31

'블랙힐즈' 일대 인디언 보호구역 지정.. 금광 발견되자 백인들 '무단점유' 나서
美 "이참에 헐값에 사들이자" 대표단 보냈지만 별소득 없어
"지정된 주거지역서만 지내라" 대대적 인디언 소탕작전 벌여
▲'인디언들의 성산'인 블랙힐즈에는 다량의 금이 매장돼 있어 인디언과 백인간의 공방이 치열했다.
▲'인디언들의 성산'인 블랙힐즈에는 다량의 금이 매장돼 있어 인디언과 백인간의 공방이 치열했다.
■수우 인디언 이야기

백인에게 마지막까지 가장 끈질기게 저항한 인디언 부족은 수우족으로 그들은 미군과의 대평원전투에서 수많은 전설을 남겼다. 수우 인디언은 크게 세 부족으로 나뉜다. 산티 수우족(동부 다코타족), 라코타 수우족(티톤 수우족), 양크톤 수우족(서부 다코타족)이다. 이들 세 부족은 다시 몇 개의 지파로 나뉜다. 시팅불(Sitting Bull) 대추장은 라코타의 훙크파파 지파에 속하고 전설적 전쟁영웅인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와 대추장 레드 클라우드(Red Cloud)는 라코타의 오글라라 지파에 속한다.
라코타 수우족의 또 다른 지파로는 미니콘주, 브룰레 등이 있다.

■플래트강 다리 전투

플래트강 다리는 오리건 트레일과 보즈만 트레일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동서 교통로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다. 1863년께부터 시작된 백인들의 통행 본격화로 라코타 인디언들은 들소 사냥에 지장을 받아왔기 때문에 늘 보즈만 트레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보즈만 트레일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플래트강 다리를 공격하기로 정했다. 1865년 7월 25일과 26일 양일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29명이 사망한 데 반해 인디언은 8명 정도 사망에 그친 것으로 추정된다.

■코너 장군의 파우더강 원정

보즈만 트레일을 둘러싸고 인디언과의 충돌이 점차 격화되자 미군은 코너 장군의 지휘 아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파우더강 일대의 인디언 전사들을 소탕하기로 했다. 코너의 원정부대 중 코너가 직접 지휘한 소부대는 보즈만 트레일 상에 리노 요새를 건설하고 원정 도중 몇 차례 인디언과의 국지전에서 승리했다고 볼 수 있으나 나머지 두 소부대는 인디언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크게 시달렸다. 결국 코너의 작전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인디언들은 이번 전투를 통해 보즈만 트레일 통행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으며,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뭔가 더 강력한 조치가 있지 않는 한 인디언의 저항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페터만 전투

1866년 여름 캐링턴 대령이 지휘하는 약 700명의 미군이 네브래스카의 커니 요새를 출발해 라라미 요새로 왔다. 이 부대는 보즈만 도로의 안전한 통행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코너 요새 외에 필커니 요새와 스미스 요새를 추가로 건설했다.

그해 12월 라코타의 대추장 레드 클라우드가 지휘하는 인디언 연합군은 필커니 요새에 주둔하는 군인들을 몰살시킬 작전을 꾸몄다. 전설적인 인디언 전사 크레이지 호스가 12월 21일 공격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유인병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미군들은 인디언들의 계략에 속아 유인병들을 쫓아갔다가 매복해 있던 인디언들에게 꼼짝못하게 포위되는 바람에 페터만 대위를 포함한 81명이 몰살을 당했다.

■라라미 조약 체결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미국 정부는 또다시 화친조약 체결을 시도해 1867년 9월 19일 셔먼 지역사령관을 대표로 해 인디언 추장들과의 회담을 추진했다. 이 회담장에 레드 클라우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 다른 정부 대표단이 11월 9일 라라미 요새로 왔다. 레드 클라우드는 전령을 보내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사냥터 중 마지막 남은 파우더강 유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1868년 봄에 셔먼을 포함한 정부대표단이 라라미 요새를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레드 클라우드는 보즈만 도로상의 요새와 군인들을 모두 철수시키면 회담장으로 가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번에도 협상대표단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결국 미국 정부가 두 손을 들고 문제의 세 요새로부터 모두 철수했다. 11월 6일 체결된 라라미 조약에 의거, 수우족은 그들의 성산인 블랙힐즈를 포함한 사우스다코타주 일대를 인디언보호구역으로 지정받고 파우더강 유역의 사냥터도 인디언의 땅으로 유지될 뿐만 아니라 서부 캔자스와 동부 콜로라도에서도 사냥할 수 있도록 인정받았다.

■또 금광 발견이 문제였다

당초 미국 측은 라코타 인디언 말로 '파하 사파'라 불리는 인디언의 성산 블랙힐즈를 별로 쓸모없는 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금이 발견되면서 노다지를 캐 큰돈을 벌고자 하는 백인들이 밀물처럼 산속으로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 정부는 백인들의 무단점유를 기정사실화하고 이참에 블랙힐즈뿐만 아니라 인디언의 영토로 남겨 놓았던 땅 중 많은 부분을 헐값에 양도받기 위해 1875년 9월에 대표단을 인디언주거지역에 보냈다. 물론 블랙힐즈에서 나오는 금의 가치에 비하면 말도 안되는 헐값을 제시했다. 대표단은 아무런 소득 없이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블랙힐즈를 수중에 넣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 미국 정부는 보다 강력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대대적 인디언 소탕작전

1875년 12월 3일 인디언담당 국장은 다음해 1월 말까지 지정된 주거지역 밖에 거주하는 인디언은 모두 주거지역 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하고 이를 어기는 인디언은 가차없이 공격해 강제로 끌고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인디언들은 미국 정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여전히 지정된 주거지역 밖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편 봄이 되면서 크레이지 호스는 자기를 따르는 인디언 부족 모두를 데리고 훙크파파 지파의 대추장 시팅불의 캠프 근처로 옮겨왔다.
이 무렵 미군은 적대적 인디언, 곧 주거지역 내 수용을 거부하는 인디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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