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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인디언을 찾아서](14) 인디언에게 치욕적인 패배 당한 미군, 블랙힐즈 강제로 빼앗고 무차별 학살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2.04 17:27

수정 2016.02.11 20:11

리틀빅혼강 전투와 카스터 장군
카스터가 이끄는 제7기병연대, 전투 시작 2시간만에 전멸
시팅불과 크레이지 호스, 승리 이끌었지만 도피자 신세로..
미군들이 인디언 마을로 접근해올 무렵 인디언 연합부족들은 리틀빅혼강의 서쪽 둑을 따라 약 5㎞에 걸쳐 인디언 티피촌을 이루고 있었다. 수천명의 젊은 전사를 포함해 1만명 이상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76년 6월 25일, 리틀빅혼강 전투

1876년 6월 25일 새벽에 카스터 부대와 동행했던 인디언 용병 정찰대가 인디언 마을을 발견해 카스터에게 보고했다. 카스터는 지체하지 않고 그날 낮에 바로 기습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인디언 캠프를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리노의 소부대가 동에서 서로 강을 건너와 오후 2시반께 인디언 캠프의 남단에서 공격을 시작했는데 미군의 예상과는 달리 놀라서 도망가는 대신 수많은 인디언 전사들이 재빨리 거센 반격을 가해왔다.
리노의 부대는 얼마 버티지 못해 수세에 몰리게 되자 강을 건너 후퇴해 후방을 지키고 있던 벤틴의 부대와 합류했다.

오후 3시쯤 인디언들이 강 건너 동쪽에서 인디언 캠프의 북단으로 접근하는 카스터부대를 발견했다. 훙크파파 지파의 쓸개 전투추장은 바로 강을 건너 카스터부대를 추격하고, 오글라라 지파의 크레이지호스는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한 다음 하류 지역에서 강을 건너 카스터의 전면을 공격했다. 10대 1 정도로 엄청난 열세에 있었고 또한 대포와 같은 위력적인 무기도 가져오지 않은 상황에서 소총에만 의존한 카스터부대의 참패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대략 2시간이 지난 오후 5시께 모든 상황은 종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에서 미군 측은 268명이 사망하고 55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군 측은 처음부터 적대적 인디언들의 인원에 관해 크게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알게 모르게 거주지역을 빠져나와 적대적 인디언 캠프에 머물고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디언을 빠트리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카스터의 부대가 인디언 마을에 가까이 오면서 인디언 정찰병들이 앞서서 인디언 마을을 정탐한 결과, 지금까지 봐왔던 인디언 마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캠프라는 것을 알게 돼 이를 곧장 카스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과욕은 필시 화를 불러오게 마련이라 카스터는 이 점을 간과하고 당초 작전 계획을 밀어붙였다가 큰 패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라코타 대추장 시팅불
라코타 대추장 시팅불

■조지 암스트롱 카스터

미국 서부개척 역사에서 카스터만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웨스트포인트 재학시절 학교 성적은 늘 꼴찌였으며 징계를 워낙 많이 받아 퇴학 직전에 이르렀으나 마침 때맞춰 터진 남북전쟁이 카스터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카스터와 같은 3학년 생도들은 모두 한 해 먼저 3년 만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전투 현장으로 배치됐다. 남북전쟁에서 카스터는 많은 전설을 만들었다. 23세의 나이에 비록 임시계급이지만 소장까지 진급하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중령의 계급으로 제7기병대장을 맡아 1868년 와시타강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다. 이번의 리틀빅혼강 작전에 참가하면서는 아라카라족 인디언 정찰병들에게 "이번 작전이 카스터의 마지막 참전이 될 것이며 장래에 미국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서 아라카라족을 잘 보살펴주겠다"라고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앤드류 잭슨도 전쟁 영웅에서 대통령이 됐고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이던 그랜트도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런 포부를 가질 만도 했을 법하다.

■블랙힐즈 결국 백인의 수중으로

인디언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백인들의 인디언들에 대한 적개심은 더 높아지고 블랙힐즈를 뺏기 위한 공작에는 더 속도가 붙었다. 9월에는 그랜트 대통령이 인디언들로부터 블랙힐즈를 양도받기 위해 새 협상대표단을 파견했다. 대표단이 가져온 새 조약안은 노골적인 협박성 문건이었다. 그 내용의 골자는 블랙힐즈와 그 북녘의 땅을 양도하고 미주리강에 있는 주거지역에서 식량을 배급받고 블랙힐즈로 통하는 3개의 도로 개설을 허용하지 않으면 더 이상 생활용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흔히 이를 '팔래 굶을래(Sell or Starve) 정책'이라고 부른다. 라라미 조약을 고쳐 블랙힐즈를 백인들에게 넘기기 위해서는 수우족 성인 남자의 4분의 3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데 상당수 전사들이 시팅불과 크레이지 호스를 따라 주거지역 밖에 나가 있어 조약 수정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인디언들은 계속 버텼다. 그러나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드디어 1877년 2월 28일 라라미조약을 수정하는 협정이 만들어짐으로써 적법성 여부에 관한 불씨를 안은 채 일단은 블랙힐즈가 백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시팅불과 크레이지 호스의 도피

전투가 끝나자 캠프에 있던 인디언 중 상당수는 빠져나왔던 인디언 주거 지역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제 600명 정도의 전사들만 주거지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적대적 인디언으로 계속 남았다. 미군들은 양도받은 지역을 순찰하며 만나게 되는 인디언들은 무조건 죽였다. 1877년 봄 도망 다니기에 지친 시팅불은 부족민들을 이끌고 캐나다로 넘어갔다.

크룩 장군의 부대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크레이지 호스를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었다. 행군 도중에 우연히 샤이엔 마을을 발견해 수많은 인디언들을 사살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맨발로 옷가지도 걸치지 못하고 황급히 천막에서 빠져나와 크레이지 호스의 캠프로 도망쳤다. 이동 첫날 밤에 노인 여섯 명과 어린아이 12명이 얼어 죽었다.
디 브라운의 명저 '내 가슴을 운디드니에 묻어라(Bury My Heart at Wounded Knee)'에는 "다음날 밤에는 어린이들을 추위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말을 죽여서 내장을 꺼낸 다음 그 속에 어린이들을 재웠다"라고 적혀 있다. 이 눈물겨운 실화를 들을 때 자식과 손자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있을까.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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