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195m, 높이 172m 달해 완공까지 수십년 더 걸릴 것.. 年 100만명 찾는 관광명소로
크룩 장군은 레드클라우드를 통해 도피 중인 크레이지호스(Crazy Horse, Tasunke Witko)를 설득했다. 레드클라우드는 크레이지호스가 투항하게 되면 파우더 강가에 인디언 주거지역을 마련해주겠다는 크룩의 달콤한 약속도 전했다. 이제 탄약도 식량도 바닥이 나 백인들과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어진 크레이지호스는 그 약속을 믿고 1877년 5월 7일 로빈슨 요새로 들어갔다.
■크레이지호스의 최후
1877년 6월 로키산맥 너머 몬태나에서 네즈 페르세 인디언과 미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인디언 주재관이 이 전쟁에 참가할 용병을 모집했다. 몇몇 젊은 인디언이 용병으로 지원하는 것을 본 크레이지호스는 이를 매우 부끄러운 일로 여겨 부족민을 이끌고 다시 파우더강 쪽으로 나가버리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곳곳에 심어놓은 인디언 프락치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크룩은 당장 크레이지호스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크레이지호스는 크룩이 있는 로빈슨 요새로 연행됐다. 그날은 너무 늦어 크룩을 만날 수 없어서 그를 잡아갔던 군인들이 그의 신병을 인디언 경찰관에게 넘겼다. 크레이지호스가 그 경찰관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왕년에 크레이지호스 곁에서 백인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용맹을 뽐내던 작은 거인이 백인에게 매수돼 동족을 핍박하는 경찰로 변신해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작은 거인과 케닝턴 대위가 호송해 경찰 유치장으로 데리고 갔다. 철창살 안에서 짐승을 잡을 때나 쓰이는 덫에 발이 묶인 사람들을 보는 순간 크레이지호스는 분노가 폭발해 호송하던 군경과 심한 격투를 벌였다. 이때 옆에 있던 젠틀스 일병이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대검으로 크레이지호스의 복부를 찔렀다. 크레이지호스는 이렇게 1877년 9월 5일 밤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크레이지호스의 생애
크레이지호스라는 이름의 원래 뜻은 'His Horse is Crazy'인데 백인들이 부르기 쉽게 'Crazy Horse'로 불렀다고 한다. 크레이지호스의 친가와 외가에는 뛰어난 추장과 전사들이 즐비하다. 그의 삼촌인 작은 매는 오글라라의 유명한 전투 추장이었으며 작은 매와 같은 이름을 가진 친동생은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외삼촌 점무늬 꼬리는 미니콘주지파와 브룰레지파가 1864년 샌드크리크 대학살 후에 연합하게 되면서 브룰레의 추장으로 추대됐고, 외사촌인 구름을 잡아라는 1875년부터 그가 죽은 해인 1905년까지 30년간 추장을 맡아 미니콘주지파를 이끌었다.
1854년 크레이지호스가 열네 살 나던 해에 그래턴 소위 사건으로 브룰레지파 추장 정복하는 곰이 미군에 의해 살해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백인에 대한 적개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한다. 1850년대 말과 1860년대 초반에 걸쳐 라코타와 적대관계에 있던 크로우족과 포니족 등과의 전쟁에서 크레이지호스는 크게 용맹을 떨쳤다. 특히 1865년에 있었던 플래트강 다리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용감성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전투 추장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그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여자가 크레이지호스가 청혼하기도 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다. 크레이지호스는 고민 끝에 1867년 가을에 그 여자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실행했는데 그녀의 남편이 그들이 묵고 있는 티피로 찾아와 크레이지호스에게 총을 쏘았다. 다행히도 크레이지호스는 큰 상처는 입지 않고 턱에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이 일로 물의를 일으켜서 전투 추장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는 1866년의 페터만 전투와 1876년에 있었던 리틀빅혼강 전투에서 인디언 연합군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수우족이 이 만큼의 땅과 전통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크레이지호스, 시팅불, 레드 클라우드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헌신한 덕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을 수우의 전설을 만든 3인방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미국 정부가 1980년 말부터 20년간 수행한 '위대한 미국인 기념우표 발행 사업'에서 이들을 선정해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크레이지호스 석상 조각
생전의 모습도, 사후의 무덤도 남기지 않았던 크레이지호스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석상 조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네 명의 대통령 얼굴이 조각돼 있는 러시모어 산으로부터 불과 20여㎞ 떨어져 있는 산더헤드 산 한편에 말을 탄 용감한 모습의 크레이지호스가 다시 태어나고 있다. 총 길이 195m, 높이 172m에 달하는 이 석상은 크레이지호스의 얼굴 크기만 해도 러시모어 산에 있는 대통령 얼굴의 1.5배인 27m나 된다고 한다.
이 거대 석상의 조각은 폴란드계 미국인 조각가 주얼카프스키에 의해 1948년 6월 3일 시작됐다. 주얼카프스키는 그때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인종차별적인 모욕도 받았으며 재정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정부의 재정지원 제의도 거절하고 민간단체의 기금과 개인적인 헌금 등으로만 자금을 조달해 공사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그의 사후에는 주얼카프스키의 열정에 반해 18세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루스가 그녀의 자녀 7명과 함께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당초 주얼카프스키는 말부터 먼저 완성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의 사후에 루스는 우선 얼굴부터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찾아오도록 만들면 기금 조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작업 진행 순서를 바꾸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아들어가 1998년 얼굴이 완성된 후로 연간 100만명 이상이 찾는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이 크레이지호스 조각상은 카벤디시가 쓴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1001개의 역사적인 장소'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공사가 시작된 지 7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그 절반도 진척이 안된 것으로 보이는데 완공까지는 최소한 수십년이 더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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