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 창신동 낙산 아래에는 작은 초가집 한 채가 복원되어 있다. '비우당(庇雨堂)'. 청빈한 선비 이수광은 비바람만 겨우 가린다는 허름한 이 집에서 '지봉유설'을 썼다. 이 책을 쓸 당시 그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조완벽(趙完璧)전'을 남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였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 급제를 꿈꾸던 스무 살의 조완벽은 경남 진주에서 왜군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다른 조선인 포로와 같이 일본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그가 한문에 능통하다는 것이 알려져 교토의 무역 상인에게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유구(오키나와), 여송(필리핀), 안남(베트남) 등지를 돌며 해상무역을 하던 일본 상인은 현지인과 필담을 위해 한학이 뛰어난 조완벽을 배에 태웠다. 그 바람에 조완벽은 세 차례에 걸쳐 베트남 등 동남아를 돌며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는 조선 조정의 포로송환 노력으로 10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베트남에 갔을 때, 그곳의 고관들과 유생들은 조선 청년이 왔다는 소식에 집에 초대하며 좋은 음식을 접대했다. 이들은 조선 선비 이수광의 시를 보여주며 베트남 학생들이 이를 공부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좋은 대접을 받은 조완벽이 조선에 돌아와 주위 사람들에게 말한 경험담이 이수광의 귀에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이수광은 1597년 사신으로 연경(베이징)에 갔을 때, 안남 사신 풍칵코안과 같은 숙소에서 50여일간 머물며 필담으로 시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 써준 시가 멀리 베트남에까지 소개되었던 것이다.
조선 선비의 시가 베트남에서까지 유행한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조완벽이 목격한 일본과 베트남 등의 바다를 통한 교역은 주목받지 못한 점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성리학에 갇혀 다른 가치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농공상의 서열에 사로잡힌 선비 사회는 상교역의 중요성을 못 느낀 채 먼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바다를 통한 교류가 활발했다. 중국 산둥반도 연안에는 신라인 거류지가 있었다. 많은 학생과 승려가 중국에 유학을 갔고, 멀리 인도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장보고는 당나라,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했으며 고려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에는 송나라, 아라비아, 일본 배들이 드나들었다. 그런데 왜구 출몰에 골머리를 앓던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펴자 조선도 같은 정책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17세기 해금정책을 철회했고, 일본은 임진왜란 직전 벌써 소년사절단을 멀리 유럽까지 보냈다. 조선만은 이를 1882년까지 지속했다.
왜 조선은 조완벽에게서 해상 교류의 시사점을 찾지 못했을까. 이수광이 '지봉유설'에 외국의 문물, 초화·곤충 등을 소개한 것조차 충격이었을 정도로 선비들의 사고는 굳어 있었다. '지봉유설' 서문에서 김현성은 '총명을 개발하고 지혜를 더욱 진보하게 하니, 귀머거리에게 세 개의 귀가 생기고, 장님이 네 개의 눈을 얻는 것과 같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유학 외의 내용을 쓴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공께서는 처음부터 저술하려는 뜻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니고 곧 여유로운 시간에 놀이 삼아 적어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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