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4월이 아니었다면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불후의 명작 '광장'은 4·19 직후 작가 최인훈이 쓴 걸출한 명작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프고도 민감한 사안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넓고 또 깊게 드러냈는데 그중 하나가 '총독의 소리'다. 이 작품에서 최인훈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 도처에 뿌리박힌 도저한 친일 근성에 대해 '풍자적으로' 찬미한다. 이 작품은 1945년 패전 이후 일본 총독이 일본으로 도주하지 않고 한국 사회에 남아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조선총독부 지하부 소속 유령 해적 방송'으로 세를 규합해 다시금 식민지 건설을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며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이 '총독의 소리'는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신식민지주의와 매판성에 대해 전복과 폭로와 희화화의 방식으로 근본적인 비판을 감행하고 있다. 총독은 방송을 통해 "무엇보다 다행한 것은 철수하는 내지인에 대해 반도의 백성이 취한 공손한 송별 태도"였다고 말하고 그것은 "오로지 그동안 제국의 반도 경영에서 막강한 권위와 그로 인한 반도인의 가슴 깊이 새겨진 신뢰의 염과 아울러 방향감각을 상실한 반도인의 얼빠진 무결단에서 온 것으로서 오랜 통치의 산 결실이었다고 하겠다"고 자평하고 있다.
'지하운동을 하는 총독'이란 발상은 그의 '태풍'이나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와 같이 한갓 작가적 상상에 불과할 뿐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다. 그만큼 1960년대 당시 친일 잔재들이 얼마나 심각했던 것인가를 반증해주는 문학적 사례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그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지 않았나 할 즈음에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센터장이 스스로 친일파라 자인하고 건배사로 '천황 폐하 만세!'를 세 번 외쳤을 뿐 아니라 자신의 조부가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고도 말했다. 이런 말은 소위 지하에 있는 '총독'이나 할 소리지 억압과 수탈과 착취를 당한 식민지 후예가 할 소리는 분명 아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은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단순 경비병에 불과했던 94세 노인 라인홀트 한닝에게 5년의 징역형이 선고된 지 얼마 안되어 발생했다. 우리는 어떠했던가. 1948년에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1년 만에 무산되고 친일 행정관료들이 대부분 모두 복권되지 않았던가. 최인훈의 '총독의 소리'에서 총독은 이렇게 말하면서 씩 웃는다. 불과 2년간의 점령에 대해 독일군은 프랑스에서 패주할 때 현지 주민으로부터 온갖 습격을 다 받았다. 그렇지만 40년의 통치에 대해 웃으며 보내주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말 아닌가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다른 게 아니다.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자꾸 이런 친일적 발언을 내놓으면 일본이 우리를 너무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겠는가 해서 하는 말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여러 과거사 청산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도 무성의하게 접근하게 된 이유도 다 우리가 너무 쉬운 상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뼈아픈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김진기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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