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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남산 예장자락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8.23 16:54

수정 2016.08.23 16:54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경복궁 뒷산인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했다. 매일 면대(面對)하는 남산을 왕과 동격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렇게 남산은 조선의 영산(靈山)중에서도 으뜸이 됐다. 특히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북사면은 민가가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자연 그대로 보존.관리했다. 남산 북쪽 가파른 기슭의 예장동 일대에는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이 있었다.
예장(藝場)은 무예장의 줄임말이다. 인근 마을에 살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소년시절 예장에서 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인들의 기개가 깃들어 있던 예장자락은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다. 일본은 예장자락을 조선 침탈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1885년 예장 옆 녹천정 자리에 공사관을 지었으며 1898년 남산대신궁을 건립한데 이어 1905년 통감부를 세웠다. 예장동과 충무로 일대가 일본인 집단거류지로 바뀐 것도 이 무렵이다. 통감부는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총독부로 사용됐다.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통감은 통감관저에서 이완용 대한제국 총리대신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은 이른바 경술국치일이다.

광복 후 일본이 훼손한 예장자락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6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창설하면서 예장동 왜성대공원 자리에 별관을 뒀다. '남산 대공분실'로 통하는 중앙정보부 6국 자리는 독재정권의 고문수사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이곳의 서울 유스호스텔과 TBS교통방송청사, 서울시 재난본부 등이 모두 중정 건물이었다. 1970년 남산1호터널이 준공되면서 예장자락은 시민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긴 지역으로 전락했다.

서울시가 한일강제병합조약 체결 106주년을 맞은 22일 옛 통감관저 터에서 남산 예장자락 재생사업 착공식을 열었다. 시는 2018년 4월까지 예장자락과 명동을 잇는 공원을 조성, 시민들에게 남산의 옛모습을 돌려줄 계획이다. 기존의 공공청사들은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1호 터널 입구 지하차도는 보행전용 터널로 바뀐다.
이곳과 남산 정상을 곤돌라로 연결하려던 당초 계획은 주변 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중단됐다.

예장자락이 고립을 벗고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경관을 복원하되 아픈 역사도 함께 되새길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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