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에 시간 멈춘 송길용씨…“실종된 우리 혜희 한번은 보고 죽어야죠”
한해 국내에서 발생하는 실종아동은 2만명이 넘는다. 2005년 실종아동법이 제정되고 경찰 수사기법도 발달하면서 신고된 실종아동의 99%는 하루나 이틀 내 가정으로 복귀하지만 장기 실종아동은 수십년 동안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로 인해 아이들은 범죄에 노출되고 부모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느라 삶은 피폐해진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구성된 파이낸셜뉴스 스포트라이트팀은 장기실종아동에 초점을 맞춰 가족들의 애타는 사연과 경찰, 보건복지부, 실종아동전문기관 등 유관기관의 실종자 찾기노력 등을 심층취재, 보도하는 기획시리즈를 마련한다. 이를 통해 장기 실종아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기대한다.
경기 평택시 송길용씨(65)의 집에서 잃어버린 딸을 향한 애타는 부정이 담긴 편지가 눈에 띄었다. 따뜻한 4월의 봄날 찾아간 송씨의 집은 18년 전 시간에 멈춘 듯 했다. 작은 원룸 벽에는 온통 둘째딸 혜희씨(당시 17세)의 빛바랜 사진들로 가득했다. 사진 속 혜희씨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꿈 많은 여고생이었다. 딸을 찾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사진도, 18년간 뿌린 각종 전단도 혜희씨 사진과 함께 벽면을 가득 채웠다. 무엇보다도 송씨가 직접 쓴 ‘그리운 나의 딸 혜희에게’ ‘그리운 나의 아내에게’ 글에서 18년 전 행복했던 당시로 돌아가고싶은 송씨의 마음이 전해졌다.
■연이은 비극…막내딸 실종 이후 아내 자살까지
1999년 2월 13일. 당시 고교 2학년생이던 혜희씨는 여느 때처럼 야간수업을 마치고 귀가 버스를 탔다. 평택 도일동 하리마을에서 축사를 운영하던 송씨의 집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어 버스에서 내려서도 외진 길을 한참 걸어야 했다. 그날 밤 10시10분께 버스에서 내린 혜희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라졌다. 전교 1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 했던 막내딸은 그렇게 아버지의 가슴에 멍으로 남았다.
밤 11시가 넘어 딸이 들어오지 않은 사실을 안 송씨는 밤새 딸을 찾아 헤맸으나 흔적도, 목격자도 없었다. 다음날 새벽 딸이 탔던 버스 기사를 만나 ‘30대 초반 남성이 혜희씨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는 말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송씨는 혜희씨 사진을 가리키며 “딱 이 모습이다. 당시 구정을 3일 남기고 실종됐다”며 “경찰이 와서 일대를 수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결국 송씨는 아내와 함께 직접 딸을 찾아 나섰다. 집도, 축사도 정리하고 화물차를 구입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만나면 전단을 돌리고 거리에는 현수막을 걸었다. 맨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어 라면과 소주로만 버티며 3~4년을 보냈다. 송씨는 “모든 걸 정리한 뒤 화물차에 혜희 얼굴을 붙이고 애 엄마와 돌아다녔다. 둘이 울기도 많이 울고 참…”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송씨의 비극은 딸을 잃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심장병과 알코올중독을 앓던 아내가 우울증까지 겹치면서 2007년 딸의 얼굴이 새겨진 전단을 품에 안은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 송씨도 몇 번 자살을 시도했으나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수십 번 마음을 먹었다. 낭떠러지에서도 굴러 떨어지고 다리에서도 떨어졌는데 죽지도 않았다”며 울컥했다.
■몸도 마음도 쇠약…희망 놓지 않고 매일 거리로
송씨는 떠난 아내와 남겨진 큰딸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서울에서 부산, 도서지역까지 전국을 다니며 단순노동으로 돈을 벌었고 번 돈은 고스란히 전단과 현수막을 만드는데 썼다. 전국 휴게소에 혜희씨 현수막이 걸렸고 지난 18년간 전단만 300만장을 뿌렸다. 송씨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도움도 이어졌다. 어린이재단 실종아동전문기관은 활동비 일부를 보조해주고 있으며 5년 전에는 평택시의 지원으로 현재 집을 임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송씨의 몸과 마음은 점차 쇠약해졌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허리는 구부리지도 못할 지경이고 무릎 관절은 조금만 걸어도 통증이 심하다. 고통으로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잘 정도다. 돈이 없어 수술도 하지 못하고 약에 의존한 채 살고 있다. 그는 “한번은 포기하려고 보름간 술만 먹었더니 뇌경색이 와서 죽다가 살아났다”며 “술, 담배를 끊고 다시 애를 찾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고 전했다. 경제적 어려움도 만만찮다. 그는 “애 얼굴을 분간하기 위해서는 흑백이 아닌 컬러로 전단과 현수막을 만들어야 하는데 유류비까지 더하면 지원을 받아도 턱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송씨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금도 일하는 시간 외에는 전단을 돌리러 거리에 나선다. 그는 “애한테 죄짓는 것 같아 18년 동안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다”며 “내가 먹고 사는 건 두 번째 문제고 한 번은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송씨의 마지막 바람은 다른 것 없다. 올해 35살이 된 혜희씨를 죽기 전에 꼭 한 번이라도 만나는 것. 그는 “살아있으면 한 번 보고 죽을 것인데, 그래도 애는 찾고서 죽어야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혜희야. 부디 살아서 만날 날이 오기만을 두 손 모아 빌고 또 빈단다. 만일 영원히 너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너만은 예전처럼 밝고 명랑하게 그리고 슬기롭고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아빠가”
팀장=박인옥 차장, 박준형 예병정 김문희 구자윤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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