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주에만 유리한 계약" 국회선 법 개정안 발의도
야근.휴일수당 등 미리 반영해 임금 책정
새벽 3시까지 일해도 수당은 2시간만 인정
#. 국내 굴지의 대기업 과장 A씨는 자칭 '노예'다. A씨는 평일 11시간, 토요일과 일요일은 12시간 이상 일한다. A씨에게 빨간 날은 쉬는 날이 아니다. 포괄임금 계약 때문이다. 사측은 월급에 야근수당, 주말수당을 미리 반영해 책정했다. 반강제로 야근과 주말근무가 이뤄지는 셈이다. 일한 만큼 임금을 받는 것도 아니다. A씨는 아무리 많이 일해도 평일 2시간, 주말 8시간만 수당으로 인정된다. A씨는 "정말 힘들 때는 연차를 써서 쉰다. 최근 아이가 태어났는데 돌봐준 적도 없다"며 "언제까지 이렇게 일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야근.휴일수당 등 미리 반영해 임금 책정
새벽 3시까지 일해도 수당은 2시간만 인정
직장인들은 '포괄임금제'를 포괄노예제라고 부른다. '포괄임금제'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야근 또는 주말 수당을 미리 책정, 월급으로 지급하는 계약방식이다. 반강제로 연장근로가 발생하고, 약정된 근무시간을 초과해도 수당을 못 받는다는 불만이 생기는 이유다. 최근 게임업계의 포괄임금제를 통한 노동착취가 사회적 논란이 됐지만 직장인들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전했다.
■오전 9시 출근, 새벽 3시 퇴근해도…
5월 31일 노동계 등에 따르면 포괄임금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공짜 야근'이 일상화된다는 점이다. S회계법인에서 일하는 3년차 회계사 B씨(30)는 3월부터 2개월간 감사 업무로 오전 9시 출근해 새벽 3시 퇴근하는 일정이 반복됐다. 하루 16시간 이상 일했지만 초과근로 수당은 2시간만 반영됐다. 포괄임금제 탓이다. B씨는 "일한 시간으로 따지면 최저시급도 안 되고 몸이 상해 링거 맞으면서까지 업무를 본다"고 말했다.
포괄임금제는 연장근로 시 복잡한 수당을 손쉽게 계산한다는 이유로 확산됐으나 노동법상 근거규정이 없는 근로계약이다. 대법원 판례를 통해 근무시간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효력이 인정되는 것이다.
문제는 근무시간을 특정할 수 있는 사업장조차 포괄임금제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직원 박모씨(28.여)는 최근 부장에게 "야근수당 다 챙겨주는데 일을 똑바로 안 한다"고 질책을 들었다. 사실 박씨는 매일 2시간씩 '공짜 야근'을 한다. 매일 3시간씩 초과근무를 하지만 포괄임금계약상 1시간만 수당으로 인정되는 탓이다. 박씨는 "돈도 받지 않고 야간 근무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박씨의 경우 임금체불과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적발은 쉽지 않다. 피해 직원들이 실제 출퇴근 기록을 증명하기 까다롭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근로감독관 역시 일반적 체불은 쉽게 노출되지만 포괄임금을 통한 임금체불은 사측의 방대한 자료를 모두 분석해야 해 규명하기 쉽지 않다"고 밝혔다.
피해는 고스란히 근로자 몫이다. 고용부가 5월 게임업체 12개사를 대상으로 특별 근로감독을 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2월부터 올 1월까지 직원 3250명 중 2057명이 주 6시간을 수당도 못 받은 채 더 근무한 것으로 파악됐다. 피해금액은 연장근로 수당 미지급, 퇴직금 과소산정 등으로 44억여원에 달했다. 포괄임금제로 야근을 밥 먹듯 하면서도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것이다.
■고용부 '가이드라인 제작'
전문가들은 포괄임금제가 사업주에게만 유리한 계약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이상혁 한국노총 노무사는 "포괄임금제도는 근로시간을 쉽게 특정할 수 없는 경우 이용되는 장점이 있지만 지금은 근무시간을 특정하기 쉬운 사업장에도 악용돼 무제한 연장근로를 시키고, 임금은 제대로 주지 않는 계약처럼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포괄임금제를 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지난 3월 포괄임금제 악용을 막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또 고용부는 사업장의 포괄임금제를 제한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작할 방침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대법원 판례 내용을 참고해 포괄임금제 적용에 관한 가이드라인 제작을 검토하는 단계"라며 "가이드라인에 따라 앞으로는 포괄임금제를 잘못 적용하는 사업장을 현장 점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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