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소년 유족과 시민 등이 경찰의 사건 은폐의혹을 제기하며 진실규명위원회 설치를 촉구하고 나섰다.
유족과 전국미아실종자가족찾기시민의모임(전·미·찾·모), SNS시민동맹은 개구리 소년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 설치를 촉구하고,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를 오는 26일 대구 와룡산에서 개최한다고 23일 밝혔다. 26일은 개구리 소년 유골이 발견 된 지 15년을 맞는 날이다.
일명 ‘개구리소년’이라고 불리는 대구 성서초등학교 우철원(13세, 1979년) △조호연(12세, 1980년) △김영규(11세, 1981년) △박찬인(10세, 1982년) △김종식(9세, 1983년) 등 5명은 1991년 3월 26일 실종됐다. 유족 등에 따르면 아이들은 사건 당일 인근 와룡산으로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찰은 수사 초기 뚜렷한 근거도 없이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인해 가출했다고 추측했다. 언론을 통해 문제가 집중 보도되고 나서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에게 “모든 수사력을 동원해 실종 어린이를 찾아내라”는 특별지시를 내려 뒤늦게 수사본부가 꾸려졌다. 정부는 현상금 4200만원, 군·경 등 35만 명의 인력을 투입했지만 결국 아이들의 행적을 찾지 못했다. 수사본부는 1996년 5월 해체됐다.
당시 전국 초·중·고교 학생들이 ‘대구 개구리소년 친구 찾기 운동’을 펼치는 것을 시작으로 국가적인 사건이 됐다. 전국새마을중앙회 등 각종 사회단체들이 2억 여장의 전단을 전국에 뿌렸고 담뱃갑, 공중전화 카드, 엽서, 어린이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에도 아이들 사진이 인쇄됐다. 신문과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다뤄졌다.
유족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헤맸다. 비극도 찾아왔다. 김종식군 아버지 철규씨는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화병을 얻었다가 2001년 간암으로 숨졌다. 박찬인군의 집은 1992년 화재로 소실됐다. 전국을 다닌 부모들은 1993년 끝내 자식 찾기를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2년 9월26일 사건 발생 11년 6개월 만에 도토리를 줍기 위해 산을 오르던 사람이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편 와룡산 중턱에서 아이들의 유골을 발견하면서 수사도 다시 진전됐다. 공소시효 만료 약 4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유족 등은 당시 경찰 수사가 미흡했다고 말한다. 경찰이 유골 발굴현장을 보존하기 보다는 곡갱이와 삽으로 현장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유골 4구를 파헤쳐 놓았고, 유골 1구만 감식반이 와서 조사했다고 전했다. 또 경찰은 유골 발견 이틀 만에 사인을 저체온증에 의한 자연사로 추정했다. 이어 “아이들이 야간에 길을 잃고 헤매다 탈진해서 숨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경찰은 아이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으로 온몸을 덮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반면 유골을 감식했던 경북대 법의학팀은 검사 40여일 후에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법의학 팀은 “두개골에 나타난 손상 흔적을 분석한 결과 소년들은 ㄷ자 모양의 예리한 흉기와 발사체로 타살된 것이 분명하다”고 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유족들은 2005년 말부터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주장했지만 공소시효 연장을 담은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이 사건의 시효 만료 전에 통과되지 못했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2006년 3월25일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영원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유족들은 경찰의 사건 은폐 의혹을 집중 추궁하고 있다. 2017년 6월 28일 나주봉 회장은 故우철원군 아버지 우종우씨(70)와 경찰의 사건 무마, 조작, 은폐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대구 성서경찰서에 실종 후 2년, 시신 발견 후 1년 동안의 수사관련 자료 정보공개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7월 28일 이의 신청을 했지만 경찰은 내사를 이유로 또 거부했다는 것이다.
나주봉 전미찾모 회장은 “개구리 소년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며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 설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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