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발렌타인 데이’
"네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나는 계속 교감하고 있어."
연극 '발렌타인 데이'(사진). 제목만 들었을 땐 초콜릿 향기가 폴폴 나는 2월의 어느날처럼 달달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러브스토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그렇듯 예상은 빗나간다. 사람의 마음은 합이 맞기보다 어긋나기가 더 쉬운가보다. 이 연극 속 세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세 사람은 너무도 사랑했다. 다만 엇갈렸을뿐.
이 연극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발렌틴'이다.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는 그를 떠올리는 날이다. 두 명의 여자 '발렌티나'와 '까쨔'는 예순살, 발렌티나의 생일에 20년 전 세상을 떠난 그를 각자의 기억 속에서 떠올린다. 유령처럼 떠오르는 발렌틴의 환영, 떠난지 오래된 그 사람을 놓지 못하는 마음이 발렌틴을 마치 지금도 살아 숨쉬는 사람처럼 만들었다. 발렌티나의 생일이지만 동시에 발렌틴이 세상을 떠난 날인 이날, 발렌티나의 마음은 더욱 비참하다. 열여덟살 첫사랑이었던 발렌틴과 맺어질 수 없게 된 결정적 원인에 까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발렌티나의 입장에서 까쨔는 그녀 인생을 사로잡았던 사랑을 빼앗아 자신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다. 물론 예전부터 발렌티나의 어머니는 변변치 않은 형편에 처한 발렌틴과의 교제를 반대했다. 하지만 시베리아 열차 승무원인 까쨔가 발렌티나의 어머니를 도와 시베리아에 있는 발렌틴에게 발렌티나가 결혼한다는 거짓 전보를 대신 보내지 않았다면 발렌틴과 발렌티나는 일평생 함께했을지도 모른다. 까쨔는 결국 발렌티나를 대신해 발렌틴과 결혼하게 되고 발렌티나는 서른다섯에 우연히 발렌틴과 까쨔를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혼자 살아간다.
까쨔에게 있어서도 발렌티나는 가시와 같은 존재다. 오랫동안 사랑해온 발렌틴의 마음은 항상 발렌티나를 향해 있다. 발렌틴의 껍데기만을 안고 사는 공허한 결혼 생활. 결국 서른다섯이 되던 해 발렌틴은 까쨔를 버리고 발렌티나에게 간다. 불륜이다. 당당한 그들의 모습에 속이 갈기갈기 찢어지지만 까쨔는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사랑했던 한 남자는 결국 그 두 명의 여자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남겨진 두 여자는 인생의 노년을 함께 보낸다. 가장 증오했던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운명.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다. 까쨔는 더 이상 망가질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스스로의 삶을 방치한다. 발렌티나는 순간순간 살의를 느낀다. 하지만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애증이 쌓여 결국엔 정이 남는 인생. 사실 어느 누구의 마음도 악하지 않았지만 운명이라는 게임 속에서 불행을 꽃피웠다.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과 엇갈림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공연은 14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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