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이태원' 위치는 어디?
향토 사학계 "용산고 앞 아닌 용산기지 내 또는 해방촌 부근"
위치 오류 인정돼도 당분간 이동 어려워...
향토 사학계 "용산고 앞 아닌 용산기지 내 또는 해방촌 부근"
위치 오류 인정돼도 당분간 이동 어려워...
서울시 용산구 용산고등학교 정문 앞에는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제 49호 ‘이태원 터’(梨泰院址)표석이 있다.
이 표석은 1988년 12월 설치됐으며 표면에는 ‘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 근교 네 숙소(四院,) 의 한 곳’이라고 설명돼 있다.
하지만 최근 향토 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이태원의 정확한 위치가 용산고 앞이 아닌 현 용산미군기지 내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옛 경성위수병원) 인근이며 이태원 마을은 남산대림아파트 일대(옛 일본군 사격장)로 추정된다. ‘해방촌’과 ‘경리단 길’로 잘 알려진 곳이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사학자는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발견한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韓國龍山軍用收容地明細圖) 지도와 각종 문헌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는 대한제국 말기 일본군이 용산 일대에 군 기지를 세우기 위해 대축적 측량과 등고선 등의 근대식 작도법을 사용한 지도다.
이 지도와 현재의 위성지도를 겹쳐본 결과, 현재 표석의 위치와 이태원 마을의 거리는 약 1km 떨어진 해방촌 부근이다. 나아가 ‘국역경성부사’(1934년)에 따르면 ‘이태원은 경성위수병원과 동북쪽으로 사격장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일대 밭에서 자주 대형 기와 파편이 나왔다고 전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1906년 러일전쟁 승리 후 용산에 주둔하면서 원은 철폐하고 그 자리에 경성 위수병원을 세웠으며. 또 원을 따라 형성됐던 이태원 마을은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공중분해됐고 이 지역에 살던 주민들은 현재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쪽이나 보광동으로 강제 이주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태원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정에선 한양도성 밖 4대원(四大院 이태원·보제원·홍제원·전관원)을 설치했다.
이중 이태원은 한강 이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공무수행 관리나 여행자가 한성 남대문을 빠져나와 영남 지방으로 가기위해 한강을 건너기 전 머물거나, 반대로 남쪽에서 한양으로 들어가기 직전 이곳에 머물렀다.
한강 도강 후 노들나루를 거쳐 용인로와 만나며 용인로는 충주·문경·대구·동래·부산으로 이어졌다. 이 옛길은 조선통신사의 가도로서 과거 대규모 사절단이 이곳을 거쳐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원과 서빙고, 한강진 등이 자리하면서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됐다.
1436년 세종실록에는 도성에서 5부 관리를 내려보내 진제장(賑濟場)을 세웠으며 빈자에게 밥을 주고 약을 나눠주는 구휼정책도 이곳에서 폈다.
서울시청 역사문화재과는 현행 표석에 대한 위치 오류를 인지했다. 하지만 이동을 권장하는 지역이 현재 군사기지로 구획되어 있어 표석 이동이 쉽지 않다. 또한 갈수록 표석 설치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에서 자리 마련이 만만치 않아 당분간 이동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김 사학자는 “이태원과 이태원 옛길은 두텁바위길(후암로)의 원형이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역사다. 일제가 빼앗아간 이곳이 곧 우리 품으로 돌아오면 표석의 위치를 바로 잡고 용산 기지터에 숨겨진 우리 역사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demiana@fnnews.com 정용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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