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에 검은 색칠이 돼 있죠. 도망자 표시에요. 여행사가 달아날 관광객을 안다는 뜻이에요”
23일 관광통역안내사 A씨는 여행사 직원에게 동남아 단체관광객 명단을 건네받을 때마다 씁쓸하다고 전했다. 여행객을 맞이한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가 부풀어도 관광객 명단에는 공항에서 이탈한다는 외국인의 표시가 돼 있기 때문이다.
■불법체류 예정자 명단 관리?
A씨만의 경험이 아니다. 다른 관광가이드 B씨는 최근 국내 여행사로부터 노동자를 뜻하는 ‘Labor(레이버)’라고 적힌 명단을 받았다. 그는 “명단에 노란색이 칠해져 있어요. 노란색 칠한 곳에 영어로 레이버라고 적어놨죠. 관광은 하지 않고 곧장 불법 취업하러 간다는 표시”라고 털어놨다.
국내 일부 여행사들이 불법체류 예정 여행객 명단을 별도 관리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해 10월 작성된 ‘B여행사 태국 관광객 명단’에는 상당수 관광객 순번 칸에 검은 색칠이 돼 있었다. 이들 관광객을 맡은 가이드는 “여행사가 표시한 사람은 모두 달아났다”며 “여행사가 도주자를 알고 있는 것은 관행화 됐다”고 주장했다. 여행사 직원이 가이드에게 단체관광객으로 온 20명의 명단을 건네며 ‘이탈자는 표시해 뒀다’고 했는데 16명은 공항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B여행사는 “여행객 명단에 특정 표시가 되는 일이 일이 종종 있다”며 “표시가 꼭 이탈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종교인이라든지 어떤 음식은 못 먹는다는 등의 의미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일부 여행사가 ‘이탈자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다는 게 업계 종사자의 전언이다. 한 동남아 전담 여행사 부장은 “동남아 이탈자가 늘면서 사전 파악을 통해 대처하기 위해 이탈자 명단을 확보하는 여행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사에서 이 같은 리스트를 관리하는 이유는 경비를 아낄 수 있어서라는 설명이다. 사전에 이탈자를 파악하면 예약한 호텔 등을 취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사들은 태국 단체여행객 1명당 10만~20만원씩 적자로 모집하는 상황에서 파악된 이탈자만큼 손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동남아 가이드는 “호텔은 보통 2인 1조로 예약하는데 이탈자가 있으면 곧바로 예약된 상품부터 취소한다”며 “명단을 받지 못할 때는 당일에 취소가 불가능해 손해로 남는다”고 전했다.
이탈자 리스트는 에이전트라 불리는 동남아 현지에서 만든다. 모객업체인 에이전트들은 동남아 여행객과 직접 인터뷰를 한 뒤 이탈할 사람인지 여부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불법체류를 위해 한국행을 원하는 동남아인이 늘면서 정확도도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한 가이드는 “현지 사람들이 직접 인터뷰하니 이탈자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정상적인 단체관광객 명단에 색칠을 하거나 ‘레이버’라고 표시한채 국내 여행사에 명단을 전달한다고 한다.
■"신고하면 '증거' 요구하니..."
여행사들은 적극적으로 신고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항변한다. 태국의 경우 한국과 무비자협정을 맺어 무리에서 이탈하더라도 90일 간은 합법적인 체류라는 것이다. 한 여행업 관계자는 “여행비를 다 내고 달아나는 사람은 불법체류자라고 의심되지만 법무부는 불법체류 증거가 필요하다고 한다”고 토로했다. 다른 여행사 관계자는 “태국 현지 여행사에 이탈하는 인원을 알려주지만 신경도 안 쓴다”며 “우리나라에서 신고를 받아주는 정부기관이 없고 괜히 현지로부터 여행객을 받지 못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최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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