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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평창] 대관령면 사람들의 2018년 평창 , 그 대관령면 옛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2.20 10:47

수정 2018.02.20 12:38

【평창=서정욱 기자】2018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평창 대관령면의 옛날 모습은 어땠을까.

지금 대관령면의 횡계리의 놀라운 변신에 대해 김광기 대관령노인회 사무장(81)은 “동계올림픽이 대관령면의 백년 미래를 앞당긴 것 같다.”고 말한다.

대관령면 사람들은 “횡계 시가지에서 이렇게 많은 외국인과 자동차를 보기도 처음이고, 집에서 창문을 열면 올림픽 시설들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것도 신기하다.”고 말한다.

왼쪽으로부터 1990년 올림픽플라자 자리, 가운데는 1990년 초 고랭지농업, 오른쪽 1990년초 지금의 올림픽 플라자 자리에 있던 황태덕장의 옛 풍경. (사진제공=평창군)
왼쪽으로부터 1990년 올림픽플라자 자리, 가운데는 1990년 초 고랭지농업, 오른쪽 1990년초 지금의 올림픽 플라자 자리에 있던 황태덕장의 옛 풍경. (사진제공=평창군)
또, “평창서 KTX 열차를 구경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제 열차타고 서울 가 보는 것이 희망사항이 되었다.
‘고 말한다.

대관령면 어르신들이 이렇게 격세지감을 느끼며 감격하는 이유가 있다. 대관령면은 ‘농사 안되고, 돈 나올 구석 없고, 오뉴월에도 눈발 날리는 곳’ 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금의 올림픽플라자가 들어서있는 횡계 8리는 해당화가 가득한 돌밭이었고, 대관령 주변에는 딱 여섯 집이 있었다 고 한다.

너른 터를 특별한 사용할 방법이 없으니, 철길 침목으로 쓰일 목재를 잔뜩 쌓아두었다고 상기한다.

8.15해방 때는 그 자리에 면민들이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는데, 모인 인원이 200명이었다.

또, 황병산과 발왕산 어간인 대관령면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로 집이나 세간이 완전히 초토가 되어, 피난갔다 돌아온 주민들은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움막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행히 대관령은 농사가 잘 안 되는 곳이었다. 물도 늘 부족해, 옆 동네 진부에서 물을 끌어 오느라 애를 먹었다. 화전으로 농토를 가꿀 수 밖에 없었다. 70년대 제주도에서 들여온 무씨로 수확에 성공한 무를 ‘제무시’에 싣고 비포장 도로를 10시간 달려 서울에 내다 팔았던 일화를 어제 일 처럼 기억하는 대관령면 사람들의 기억이 있다.

그 후 고랭지 배추가 들어왔고, 감자 종자 개발이 진행되면서, 이 곳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고랭지 농업 지역이 됐다.

그 시절 감자조합이 지금의 원예조합이 되었고, 농업은 2000년대 들어서야 파프리카, 딸기, 원예로 다양화되었다.

거친 땅을 일군 주민들은 돈이 조금이라도 되는 곳은 다 쫒아 다녔다.

김 사무장이 횡계4리 이장이었던 시절, 84년 개봉한 배창호 감독의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영화 촬영이 횡계에서 진행됐다.

피난민 역할을 할 엑스트라를 모집한다기에, 주민들을 써달라고 제작진에 부탁을 해, 350명 출연으로 정해두었는데, 당일 400명이 훌쩍 넘는 주민들이 촬영장에 나와 있어서 일당 7,000원을 6,000원으로 낮추고 다함께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도 있었다.

대관령의 칼바람은 대관령 아낙들을 억센 여장부로 만들었다. 감자를 심고 비료를 치는 양이 남자나 여자나 같은데도 배나 차이나는 품삯에 항의하며 기어이 같은 금액을 받아내곤 했다.

한 때 공판장을 운영하며 식재료부터 코흘리개 간식까지 취급하며 나름 사업을 일군 대관령사람들도 있다.

75년에 문을 연 용평스키장이 85년에 규모를 확장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대거 임시직으로 고용되었고, 90년들어 아파트와 고층건물이 하나 둘 들어섰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관문 경강선 진부역 모습. (사진제공=평창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관문 경강선 진부역 모습. (사진제공=평창군)
겨울 대관령의 눈은 유난스러워 한 번 오면 150cm가 훌쩍 넘었다는 대관령면 마을.

겨울 눈만 내리면 눈에 발에 빠지지 않도록 신발에 넓게 덧대는 설피를 신고, 지금의 스키와 매우 유사하게 생긴 전통스키를 타고 다니며 눈밭으로. 겨울 사냥을 다녔던 대관령사람들의 추억이 아련한 마을이다.

눈이 전봇대 꼭대기만큼 온 겨울이면, 눈 구덩이를 파헤치고 터널을 만들어 왕래했던 전선을 발로 밟고 다니던 그 마을.

용평스키장이 생기기전에 박춘자 할머니(78)는 "야산 2곳에 활강장을 만들고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을 동네 처녀들과 구경하곤 했다."고 말한다.

20대에 춘천에서 큰 물난리를 겪고, 아무것도 없는 빈 손으로 대관령에 터를 잡은 박 할머니는 대관령에서 처음 겪은 겨울을 ‘눈이 강산이었다’고 기억한다.

호롱불 켤 석유를 유리병에 담아 품에 안고 대관령의 겨울 바람을 지새던 사람들. 올림픽플라자 자리가 들어선 야산에 농토. 주위에 예닐곱 채 정도의 띄엄띄엄 있던 농가들.

그런 대관령면의 변화는 지난 2015년 도암중학교가 이전을 마쳤고, 황태덕장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기면서 올림픽플라자가 세워졌다. 칼바람에 바다고기를 말리던 그 황태덕장의 겨울밭에는 아름다운 조형물과 예쁜 간판들이 들어섰고, 올림픽 업무를 보러오는 젊은이들이 거리를 무리지어 지나간다.


대관령 사람들은 눈 많이 오고 춥기만 한 두메라고만 생각했던 대관령면이 올림픽으로 천지개벽한 것이 내 자식 잘된 것 마냥 자랑스럽기만 하다.

지금 그들은 마을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질서를 지키고, 주변을 청소하며 그 옛날 대관령면의 겨울, 2월을 생각한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의 도시, 평창 대관령면의 아름다운 올림픽 도시를 만든 주인공은 척박하다는 대관령을 억척스럽게 가꾸고 삶의 터전을 꾸려온 대관령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syi23@fnnews.com 서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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