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베일에 쌓인 문 대통령의 중재안을 가늠케 한다. '북한의 핵 리스트 신고'와 '미국의 종전선언'을 동시에 단계적으로 맞바꾸는 빅딜을 구상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북·미 관계를 '불신'이란 단어로 요약했다. 방북 하루 전인 지난 1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북미 간 대화의 성공을 위해서도 서로 간에 깊이 쌓인 불신을 털어내고 역지사지의 자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역지사지는 지난해 한·중간 갈등이었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문제를 푸는 우리 측 키워드였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터 사드 문제 해결에 공을 들이며, 한·중 관계 악화에 출구를 모색해 온 중국과 극적으로 갈등을 봉합하는 데 성공했다. 실제 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도 사드 갈등에 대해 "역지사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됨으로써 그간의 골을 메우고 더 큰 산을 쌓아나가기 위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역지사지는 11년전 상황과도 오버랩된다. 2007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북·미 대화를 희망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평양에서 만나 "무엇보다 나는 이번 회담을 통해 신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며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역지사지 하는 자세가 불신의 벽을 허무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를 이은 북·미 갈등속에서 역지사지 외교가 통할 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폼페이오 3차 방북에서 의견충돌로 험악한 상황까지 갔는데, 우리가 대북특사를 보낸 후 이번엔 문 대통령이 창의적으로 중재해야 한다"며 "향후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김정은과 만나 일정 정도의 의사를 갖고 대타협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역지사지의 다음 단계는 '접점'을 모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중재안을 말한다. 만일 비핵화에 대한 합의문이 원론적 수준에 그쳤던 지난 4.27 판문점 정상회담 수준에 머물거나 미국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향후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 나아가 한·미 관계는 모두 좌표를 잃고 흔들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 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문 대통령이 미국과 북한 양쪽을 대표하는 협상가, 치프 네고시에이터(수석협상가)가 돼서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표면적으로는 문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표시지만, 북·미 관계를 풀으라는 압박이었다. 문 대통령으로선 남북관계, 북·미 대화, 한·미 관계 모두 시험대에 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이번 회담에 대해 합의문이나 선언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밝힌 건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형식적인 결과물이 아닌, 북·미 중재외교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흉금을 터놓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이번 회담의 목표로 삼고 있다"며 "역지사지하는 마음과 진심을 다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 간의 불신을 털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에서는 벌써 '북한의 핵 리스트 단계적 제출' '핵시설 신고를 위한 실무준비 완료 단계에서 종전선언 추진' 등 다양한 방안이 중재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비핵화 행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색한' 반응을 답답하다고 토로한 만큼 이번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선 문 대통령의 특사단이 지난 5일 제시했던 미·북 대화 중재안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답이 될 수 있는 언급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당시 특사단은 '시한이 명시된 북측의 비핵화 초기 조치 확약→종전선언 채택→약속한 시일 내 실질적 비핵화 조치 이행'의 내용을 골자로 한 중재안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하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