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32년 입헌군주국을 선언한 태국은 영국이나 일본과 달리 왕실과 군부, 의회가 서로를 견제하는 미묘한 권력구조를 이루고 있다. 왕은 총리를 불러다 무릎을 꿇릴 만큼 막강한 권위를 쥐고 있고, 군부는 왕실의 암묵적 지지 혹은 권력욕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왕의 승인만 받으면 합법적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다. 그 결과 태국에서는 지난 2014년까지 82년간 19회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다만 비교적 쉽게 얻은 권력인 만큼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 역시 적당한 시기에 민정이양을 해야 한다. 5년 가까이 총선을 미뤄오던 군부 정권은 18일 크루어 응암 부총리 발표를 통해 오는 3월 24일에는 총선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단 현재 군부는 순순히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육군 참모총장으로 2014년 5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잉락 친나왓 정부를 몰아낸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5년 가까이 집권하며 차일피일 총선을 미뤘고, 2016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을 실시했다. 태국 의회는 하원의원 500명과 상원의원 250명으로 구성되는데 하원의원 중 350명만 유권자가 직접 뽑고 나머지는 비례대표들이다. 총리가 되려면 상하원 통틀어 750명의 의원 가운데 과반인 376명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군부는 2016년 개헌에서 민정이양을 위한 총선 이후 군부가 5년 임기의 상원 250명 전원을 임명한다고 못 박았다. 또한 선출된 의원이 아니더라도 총리가 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결과적으로 짠오차 총리는 의원으로 뽑히지 않더라도 하원에서 126명의 지지자만 확보하면 총리가 될 수 있다. 이미 군부는 지난해 팔랑쁘라차랏당(PPRP)이라는 친군부 신당을 만들어 선거 준비에 나섰다. 당에는 산업장관을 비롯한 짠오차 총리 최측근들이 지도부를 맡고 있다.
여기에 맞서는 프어타이당(PTP)은 군부와 철천지원수다. 정보기술(IT) 사업가 출신으로 지난 2001년 총리가 된 탁신 친나왓은 2006년에 쿠데타가 터지자 망명길에 올랐고, 집권당 국민의힘(PPP)은 2008년 해산됐다. 잔당들은 같은 해 PTP를 결성하고 2011년 총선에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대표로 내세웠다. 잉락도 2014년 발생한 쿠데타로 축출되어 2017년부터 고국을 떠나 오빠와 함께 해외를 떠돌고 있다. PTP는 탁신 정권에서 보건장관 등을 지낸 쿤잉 수다랏 총재를 대표로 내세우며 최근에는 탁신의 아들 판통태 친나왓까지 끌어들여 '탁신 부활'을 외치고 있다.
태국 안팎에서는 이번 선거를 사실상 탁신과 군부의 대결로 보고 있다. 태국 영자지 더네이션은 지난해 11월 예측에서 총선이 실시되면 하원 500석 가운데 PTP가 220석, PPRP가 80석, 민주당이 100석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군소정당들이 나눠 가진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정부를 구성하려면 연립을 해야 하는데 민주당은 북부 농촌지역과 빈민층을 뿌리로 삼는 PTP보다는 군부와 손잡을 가능성이 크다.
주목할 만한 점은 탁신계 정당과 군부 모두 포퓰리즘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탁신 정부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북부 농촌지역을 우대하고, 전 국민 의료보험과 농가 부채상환 유예정책 등을 펼쳐 농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남부의 반감을 사고 사회기반시설 개선에 실패했다. 잉락 역시 쌀 수매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잡아 정부재정을 파탄냈다는 비난을 받았다. 쿠데타 당시 야권에서는 군부가 이런 포퓰리즘을 끝내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군부는 탁신 정부의 자문들을 그대로 임용했다. 쁘라윳 총리는 야자유 가격 안정을 위해 3200만달러(약 358억원)의 예산을 동원하고 지난달에는 전체 노동인구의 30%가량에 해당하는 빈곤층 1140만여명에게 '새해 선물'로 1인당 500바트(약 1만7680원)를 그냥 나눠주기도 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글로벌콘텐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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