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영화가난다 1] <스윙키즈>
<스윙키즈>는 한국영화가 처한 문제적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예술적 지평을 확장하는 작가적 고민이나 독창적인 방법론 모색, 기술적인 혁신을 찾아보기 어렵단 점에서 그렇다. 안전한 흥행을 목표로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를 흔한 방식으로 버무려 내놓는 오락영화가 쏟아지는 오늘의 상황이 도리어 한국영화의 목을 죄고 있다고 느껴지는 건 기우일까.
<스윙키즈>는 뒤처졌다는 말이 부끄러울 만큼 크게 늦어 있는 영화다. 신세대 감독들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혁신을 거듭하고 나이든 노장들은 옛 이야기로부터 유효한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할리우드는 물론, 상대적으로 앞서 있음이 분명한 제3세계 영화들에 비해서도 우수한 점을 찾아보기 어렵단 점에서 그렇다.
지난달 개봉한 러시아 영화 <레토>와 비교해보면 이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스윙키즈>와 <레토>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불러온 시대적 고통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음악이 중요하게 등장하며 비슷한 시기의 미국 대중음악을 가져다 썼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한 영화는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선택한 반면, 다른 하나는 그곳에서 주저앉고 만다. 물론 후자가 한국영화 <스윙키즈>다.
<레토>는 이데올로기 대립 가운데 자유주의 세계의 음악을 접하기 어려웠던 소련의 음악가들이 남몰래 서구사회를 동경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는 당대 소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사상과 문화를 검열하고 탄압하는 오늘의 러시아 사회를 의식적으로 떠올리게끔 한다. 동시에 당대 미국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저희의 이야기를 노래하던 극중 인물들처럼, 감독 스스로가 서구세계의 영화 문법으로 소련과 러시아의 이야기를 해낸 작품이기도 하다. 얼마나 자유롭고 당당한가.
이데올로기 대립 가운데 짓밟히는 개인의 삶
이젠 <스윙키즈>의 차례다. 이 영화의 주제는 분명하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망가지는 개인의 삶으로부터 인간성을 말살하는 시대상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고통을 생생히 겪고 있는 한국에서 이러한 주제는 이미 새롭지 않은 선택이다. 기록할 만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태어난 지 무려 60주년을 앞두고 있고, <쉬리> <웰컴 투 동막골> <태극기 휘날리며> <공동경비구역 JSA> 등등 수많은 영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거듭해왔다. 그 사이 생략한 의미 깊은 작품이 또 얼마나 많았는지, 나는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더 적지 않기를 선택하려 한다.
그럼에 <스윙키즈>가 나아갈 길은 명백했다. 1990년을 전후해 막을 내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넘어서서 이 시대에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 아니면 몇몇 성공한 영화가 그러했듯 같은 이야기라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 둘 중 하나일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윙키즈>가 선택한 길은 그 가운데 무엇도 아니었으며 가장 안이하고 한심스러운 선택이어서 펜을 들어 비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의 주인공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가는 북한군 포로 로기수(도경수 분)다. 전쟁영웅으로 유명한 로기진의 동생인 그는 동지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거침없이 살아간다. 한편 수용소에 새로 부임한 소장은 남측 수용소가 북측 포로수용소에 밀리지 않는단 사실을 홍보하기 위해 전쟁포로들로 댄스 팀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전직 브로드웨이 탭 댄서라는 잭슨 상사(자레드 그레임스 분)가 임무를 부여받고 포로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열어 멤버를 구성한다. 스윙 음악에 맞춰 탭 댄스를 추는 이들의 팀명은 '스윙키즈'. 영화는 다양한 배경의 멤버들이 탭 댄스를 연마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차근히 풀어나간다.
말 많고 탈 많은 몇 개의 사건을 거쳐 로기수 역시 스윙키즈에 합류한다. 한때 북측에서 촉망받는 무용수였던 그가 탭 댄스의 매력에 빠지는 건 필연적이다. 언제고 예술은 자유를 지향하게 마련이니까. 함께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로기수와 다른 멤버들 사이에 우정과 사랑이 싹트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이들의 조그마한 행복을 짓밟아뭉개는 게 예고된 사건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문제는 이들이 맞닥뜨리는 어려움과 이를 겪어내는 과정이 너무나 전형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춤추길 좋아하는 미군 몇이 로기수에게 다짜고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부터, 굳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밑도 끝도 없는 반전을 시도해 비난을 샀던 <군함도>를 떠올리게 하는 선택, 베니 굿맨·데이빗 보위의 음악을 가져와 평범한 공연 신으로 연출한 부분이 모두 그렇다.
이념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두 장면, 광기어린 연설로 북측 포로들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심던 광국(이다윗 분)의 모습과 빨갱이란 말에 기댈 곳 없는 여자를 향해 너도나도 돌을 집어 던지던 남측 인민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장면도 마찬가지다. 굳이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수십 번은 보았을 법한 뻔한 장면의 나열이 마침내 도달한 곳 역시 '이데올로기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비인간적 상황'이란 당연한 주제일 뿐이다. 이는 <스윙키즈>가 평양에서 남한 마술사와 래퍼가 공연을 하던 2018년 개봉작이란 점을 고려하면 몹시 실망스런 일이다.
<백야>가 서른 네 살이 될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
춤과 자유를 향한 갈망, 이데올로기에 짓밟히는 개인의 삶을 키워드로 한 유명한 영화가 <스윙키즈>에 앞서 있었다. 이미 고전으로 분류되는 이 영화의 제목은 <백야White Night>다. <사관과 신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1985년 작품으로, 세계적인 발레리노와 탭 댄서가 소련으로부터 미국으로 탈출하려는 이야기를 다뤘다. 1989년부터 1991년 사이에 냉전 종식과 소비에트연방 해체가 이뤄졌으니, 미·소 냉전의 막바지에서 이데올로기에 짓밟힌 개인의 삶을 시기적절하게 다뤘다고 평가할 만하다.
2차 대전 이후 수십 년 간 지속돼 온 두 강대국의 냉전 가운데,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예술이 적지는 않았다. 전쟁과 이념이 파괴한 인간성이야 예술의 오랜 소재니까 말이다. 그러니 <백야>가 거둔 성취는 단순한 주제의식을 넘어 이야기의 방식과 완성도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테일러 핵포드가 이 오래되고 유효한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으로부터.
<백야>의 주인공은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유명 발레리노 니콜라이(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분)다. 해외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비행기가 소련 상공에서 불시착하는 바람에 소련당국에 억류되게 된다. 당국은 니콜라이에게 다시 소련을 위한 무대에 설 것을 강요하고 미국에서 망명해온 레이먼드와 그 아내 다르야로 하여금 그를 감시하도록 한다.
미국 출신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탈영해 소련으로 온 레이먼드의 본래 직업은 탭 댄서다. 그는 소련으로의 망명 후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지만 기대와 많이 달랐던 공산주의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다. 결국 레이먼드 부부는 니콜라이와 함께 탈출을 계획한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한 건 테일러 핵포드의 연출과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춤이었다. 자칫 소련에 승리한 미국에 바치는 헌시로 읽힐 여지가 있었음에도, 테일러 핵포드는 철저히 중립을 지키는 연출방식을 고수했다. 냉전의 승리보다 자유의 추구가 더욱 가치 있는 무엇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피를 토하는 듯한 춤사위를 비범하게 잡아냄으로써 영화를 온전히 자유에 대한 헌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보는 이를 박동하게 하는 그런 춤은 결코 개인의 바깥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로부터 영화는 자신의 시대에 더 대접받는 이야기가 아닌, 더욱 유효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윙키즈>의 선택은 어떠했나. <백야>로부터 30년도 더 지나 제작된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간 것이었는가. 반세기도 넘게 지난 <광장>으로부터 심각하게 후퇴했고, 30년 전의 <백야>로부터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면, 한국영화의 존재가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싶다.
이미 죽은 이데올로기를 부관참시한다
<스윙키즈>의 자레드 그레임스는 <백야>에서 흑인 탭 댄서 레이먼드를 연기한 그레고리 하인즈의 제자다. 탭 댄스로 당대 최고의 자리에 선 두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그러나 너무나도 달랐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국경을 넘은 레이먼드는 개성을 억누르는 체제의 민낯을 보고 몹시 실망해 미국으로의 재탈출을 꿈꾼다. 춤추지 않는 백인의 세계에서 흑인 탭 댄서가 느끼는 소외감과 감춰진 열망은 관객으로부터 어떤 감상을 자아냈던가.
스윙키즈 팀의 다른 멤버들, 로기수와 강병삼(오정세 분), 샤오팡(김민호 분), 양판래(박혜수 분)의 캐릭터 역시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전쟁 가운데 부모와 형제, 아내와 꿈을 잃고 갇힌 이들이 예술을 통해 다시 일어서려는 이야기가 오늘 극장에 넘쳐나는 영화 가운데 어떤 특별함을 가질 수 있을까. 새로운 무엇을 창작하는 대신 이들 캐릭터가 지닌 개성을 활용해 극적 재미를 더하기만 선택하려는 이 영화가 한심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야>가 춤과 이념을 위해 국경을 건넌 니콜라이와 레이먼드의 삶에 집중해 깊이 있는 드라마를 이끌어냈다면, <스윙키즈>는 수도 없이 많은 캐릭터를 황급히 살피다 이도저도 아닌 드라마만 짜냈을 뿐이다. 하물며 춤과 성장, 멜로와 드라마, 우정과 형제애 가운데 무엇도 선택하지 않고 서둘러 오가기를 선택한 우유부단함까지 드러내고 있음에야. 체제경쟁의 시대가 막을 내리지 않은 시점에 그 너머를 이야기했던 <백야>와 체제경쟁이 진즉에 끝난 시대에 다시 옛 이야기로 돌아간 <스윙키즈>가 극의 수준에 있어서도 차이를 내보이는 건 좀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로버트 저메키스, 마틴 스콜세지를 위시한 할리우드의 노장들이 거듭 옛 이야기를 들고 와 새롭게 만들어내는 건 그것이 작금의 미국사회에 충분히 유효한 메시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스파이 브릿지>와 <더 포스트>가 그랬고, <하늘을 걷는 남자>와 <얼라이드>가 그랬으며,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와 <사일런스>가 그러했다.
그런데 <스윙키즈>는? 이데올로기가 죽어버린 시대에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비판하는데 온 정성을 기울인 영화가 30년 전이라 해도 통할지 장담할 수 없는 안이한 드라마로 일관했다면 이 시대 관객이 보일 수 있는 온당한 반응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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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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