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광화문 밤하늘에 번개가 쳤다. 마침 깊은 생각 중이시던 세종대왕께서 놀라 수염을 한번 쓰다듬더니 앞을 향해 외치셨다. "순신아! 순신아!" 놀란 이순신 장군이 대(臺)에서 훌쩍 뛰어내려 달려와 부복했다."신 대령했사옵니다." "그대는 이 와중에도 잠이 오더냐." "죄송합니다." "매일 몰려와 북치고, 장구치고, 욕설에, 절규에, 난 불면증이 10년이 가깝다." 순신이 품에서 무얼 꺼낸다. "그게 뭐냐?" "일기입니다." "장군은 지금도 일기를 쓰나?" "요즘도 난중(亂中)이니 쓸 수밖에요. 일기를 보니 불면증이 심하실 만도 하옵니다." "최근 나더러 방을 빼라는 통에 증세가 더 고약해졌어." "이제 그 얘긴 쏙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어. 내 스스로 방을 빼겠다! 장군은 빨리 거북선을 대령하라!" "대왕, 아니 되옵니다" "어허, 내가 빼겠다는데" "대왕이시여, 제가 아우들을 불러모아 논의를 하겠으니 연후에 결정하소서." "다급해진 순신은 남산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구야! 구야! 얼른 내려와라."
남산 위 김구 동상이 자다가 벌떡 깼다. "아우도 데리고 갈까요?" "그려, 그려!" "김구는 위쪽을 향해 소리친다. "응칠아, 순신이 형이 얼른 모이래." 김구와 안중근이 광화문에 달려가 읍하고 서니, 대왕께서 혀를 차신다. "쯔쯔, 시대가 변했다. 수컷들만 모여서 무슨 일을 도모하겠다고!" 순신이 겸연쩍게 아뢴다. "황공하옵니다. 누이들도 모으겠사옵니다."
순신이 천안 쪽을 향해 고함을 치니 잠시 후 유관순과 강릉 신사임당, 진주 논개, 제주 만덕할매까지 두루마기 휘날리며 달려오고 순식간에 광화문이 방방곡곡에서 기별 듣고 달려온 동상들로 가득 찬다.
이순신의 사회로 토론이 시작된다. "각설하고, 대왕께서 방을 빼려 하시오. 괘씸도 하시고 불면증도 심각하시고, 어찌하면 좋을지 중지를 모읍시다." 그 순간, 모인 인사들이 딱 반으로 갈리며 외친다. "절대 빼서는 아니 되오." "괘씸해서 빼야 합니다."
"합당한 이유를 대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무조건 빼야죠." "무조건 빼선 안되죠. 옳소! 옳소!"
아무리 토론해도 결론이 나지 않자 대왕께서 짜증투로 말씀하신다. "자네들끼린 안되겠네. 객관적인 3자의견을 물어보라." 모두 박수를 쳤다. 그때 누군가 외친다."저 서초동에 눈 가리고 저울 든 정의의 여신 디케." "안돼. 그 여자 저울 고장난 지 오래됐어. 맞아, 안돼." 양쪽 모두 반대다. 그 순간 막내 유관순이 나선다. "오라버님들, 그럼 제가 동서양을 통해서 가장 생각 깊은 인사를 추천하겠사옵니다." 좋지 좋아. 그자가누군가? "로댕의 아들인데,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안돼! 왜 안돼? 실존인물이 아니잖아.코기토 에르고 줌, 생각하는 자, 존재하는 자다. 몰라? 무식하게! 야, 너 몇살이야? 그럼, 나잇값을 하세요. 뭐야? 이 자식이! 왜 욕을 해? 고함, 맞고함, 싸움, 싸움, 싸움.
그때 엄청 키가 큰 두 부부가 뚜벅뚜벅 다가오며 외친다. "자리들 좀 비켜달랍니다. 오늘 한유총, 한예총, 민노총, 민예총 총총총! 련련련! 집회한다고 모두들 자리 좀 빼달라고 합니다. "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부부였다. 벌써 북악산 너머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신들은 내일 밤 다시 모여 논하라." 대왕께서 천천히 대 위로 오르시며 홀로 중얼거리셨다. "제길 헐, 모였다 하면 편 가르고 싸움질이니."
이응진 한국드라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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