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호령해 오던 삼성전자가 새로운 분야에 투자할 것을 전격 선언했다. 시스템반도체가 그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미래에 주목할 산업이라고 선언했으므로 정부도 적극 지원할 의지를 표명한 것 같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의견은 아직 조심스럽다. 우리나라 최고 기업이, 그것도 그와 비슷한 영역인 메모리반도체에서 실력을 보여준 기업이 의지를 표명하고 정부도 지원하기로 했는데 왜 그럴까. 과연 시스템반도체가 메모리반도체와 무엇이 달라서 그럴까.
시스템반도체 방면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가진 기업은 미국의 인텔이다. 메모리반도체를 만들면서 실력을 쌓아가던 인텔의 창업자 밥 노이스가 1969년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 일본 중견 전자계산기 회사인 비지컴의 코지마 회장이 처음으로 CPU 개념의 반도체를 만들어 줄 것을 제안함으로써 시스템반도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고 한다. 반도체 업계에 큰 숙제가 던져졌던 것이다. 각각 다른 기능을 따로 수행하는 메모리반도체 여러 개를 계산기에 장치하고, 이들을 외부회로로 연결해서 연산 기능을 하게끔 전자계산기를 만들어오던 비지컴이 그 메모리반도체들을 한 개의 반도체에 묶어서 그 속에서 모든 연산기능이 작동하도록 하는 시스템반도체 개념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텔이라는 반도체계의 고수도 이 숙제를 제대로 풀어내느라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크기를 줄이는 데 애를 먹고, 그다음에는 경쟁력 있는 가격대로 만들어내느라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던 것이다. 시스템반도체가 상업적으로 다른 기기, 즉 컴퓨터에 CPU 형태로 처음 사용된 것이 1981년 출시된 IBM PC 5150이라 하니 그 숙제를 풀어내는 데 장장 10년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이 스토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시스템반도체라는 것이 메모리와는 차원이 다른 복합적 기술을 요한다는 점만이 아니다. 이 문제라면 이미 세계적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삼성전자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를 착안점은 시스템반도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위해 던져지는 숙제를 풀어내기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즉 숙제를 내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삼성전자 스스로가 만들어온 다른 제품들의 기능을 위한 시스템반도체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이왕 시작한 분야에서 더 높은 경쟁력을 키워가려면 새로운 개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반도체를 개발해 나가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새로운 기능 즉, 새로운 숙제를 내어줄 파트너가 계속 필요하고 그 숙제를 풀어나갈 기술이 또한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떤 파트너가 이런 숙제를 낼 수 있을까. 정부가 될 수도 있고, 해외 선진기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스타트업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숙제를 내고 풀어나가는 새로운 산업발전 방식이 진짜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에 우리 기업들과 우리 산업들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남들이 이미 그런 패러다임을 적용해 성공적으로 시장을 만들어놓은 곳에서 더 나은 생산방식과 제품을 만들어내는 경쟁력으로 커왔기 때문이다. 지금 영위하고 있는 분야에서 점점 더 거센 추격을 받고 있는 우리 산업들이 새롭게 경쟁력을 키워나갈 분야가 바로 이런 식의 산업 패러다임, 즉 누군가가 새로운 숙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풀어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김도훈 서강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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