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난임 탓에 아내가 다른 남자의 정자로 인공수정해 자녀가 태어난 경우 남편의 친자식으로 볼 수 있을지를 놓고 대법원이 22일 공개변론을 열고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부부가 동거를 하지 않은 경우에만 친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행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는지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법조계에선 이를 ‘친생추정의 예외‘라고 부른다. 공개변론에선 이미 형성된 사회적 친자관계를 중시해야 한다는 판례 유지 입장과 인공수정 등 새로운 형태의 임신과 출산이 등장한 만큼 동거 유무와 관계없이 친생추정의 예외 범위를 더 넓게 봐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동거 안한 경우만 친자부정’ 판례 바뀔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오후 2시부터 A씨가 자녀 둘을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이 사건은 다른 사람의 정자로 임신·출산한 점 등이 확인돼 혈연관계가 없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된 경우에도 민법상 '친생자 추정 원칙'을 고수해야 하는지가 쟁점이다. 판례는 부부가 동거하지 않았을 때 생긴 자녀만이 친생자 추정 원칙의 예외로 인정된다.
무정자증인 남편 A씨와 부인 B씨는 1993년 다른 사람 정자를 사용해 인공수정으로 첫 아이를 낳은 뒤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1997년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무정자증이 치유된 것으로 착각한 A씨는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마쳤다. 그러나 2014년 가정불화로 아내와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둘째 아이가 혼외 관계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A씨는 두 자녀를 상대로 친자식이 아니라며 소송을 냈다. 법원이 시행한 유전자 검사결과에서도 두 자녀 모두 A씨와 유전학적으로 친자관계가 아닌 것이 확인됐지만 하급심은 "무정자증 진단만으로 부인이 남편의 자식을 임신할 수 없는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부부가 동거하지 않는 명백한 외관상 사정이 존재할 때에만 추정이 깨질 수 있다'고 본 1983년 대법원 전합 판단에 근거한 판결이었다.
■남편 동의시 ‘낙장불입’ vs 혈연 친자형성 바람직
대한변호사협회는 의견서를 통해 “태어난 자녀를 불안정한 상태에 두는 것은 자녀의 복리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는 만큼 친생추정 제도 근간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며 “친생추정 예외로 인정해야 할 범위는 과학적 방법으로 혈연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이 명백하게 확인된 경우로 한정함이 타당하다”며 기본적으로 판례 유지 입장을 밝혔다. 변협은 다만 “제3자 인공수정에 남편이 동의한 경우에 대해선 신의칙과 금반언의 원칙에 따라 남편의 친생부인 주장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며 친생추정 예외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법 844조·847조는 아내가 혼인 중 임신한 자녀를 남편의 친생자로 추정하고, 이를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친생부인의 소’를 인정하고 있다. 혼인 중 출생자 추정을 받은 자녀에 대해 혼인 중 출생자인 것을 부인하는 소송으로, 해당 사유가 있음을 안 날부터 2년 내에 제기해야 한다.
반면 원고 측 대리인으로 나온 안성용 변호사는 “현행 민법이 친생추정 부인의 소에 의해서만 친생자 관계를 제거할 수 있도록 한 이유는 혈연주의를 기본으로 하되 가정의 평화 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이 두가지 법익의 조화가 필요하다”며 “제적기간이 도과해 친생부인 소송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가족관계의 지속을 강요하는 것으로 매우 불합리하며, 배우자 부정행위로 혈연관계가 부존재함이 명확해진 경우 등으로 친생추정 예외를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례 변경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법철학회와 한국가족법학회, 한국민사법학회도 소속 회원 의견임을 전제로 “진실한 혈연관계에 따라 친자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판례를 변경하되 그에 따른 부작용은 입양으로 해결함이 타당하다”는 반론을 제시했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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