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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바꿔나가는 악당들의 리더 [김성호의 플레이어]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01 11:15

수정 2019.06.01 22:06

[김성호의 플레이어 8] 어반스트라이커즈 리더 '지지'
“하늘에 뜬 구름을 잡으려면 발을 땅에 확실히 딛고 있어야 해.”

선선했던 가을날 어느 수업에서 수학선생님이 해준 말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어떤 맥락에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을 이루기 위해선 철저히 현실에 발 딛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알쏭달쏭했다.


잊고 있던 이 말을 오랜만에 떠올린 건 플레이어 여덟 번째 주인공 ‘지지(이예랑)’와의 인터뷰 덕분이었다. 잡히지 않는 이상처럼 보이는 일들을 그는 현실에 발을 딛고서 하나씩 하나씩 해내가고 있었다.

하는 일들이 많아 본인을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했다는 그는 아티스트 그룹 ‘어반스트라이커즈’를 통해 서울을 바꿔나가려는 사람이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직접 자기가 사는 도시 서울을 바꿔나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게 목표라니, 서울시장 못지않은 큰 포부다.

■도시를 바꾸는 악당 '어반스트라이커즈'의 리더

2014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진행한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완성된 모습. 건축자재로 만든 앙상한 뼈대에 시민들이 직접 테이프를 붙여 알록달록한 터널을 완성했다. / 제공=어반스트라이커즈
2014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진행한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완성된 모습. 건축자재로 만든 앙상한 뼈대에 시민들이 직접 테이프를 붙여 알록달록한 터널을 완성했다. / 제공=어반스트라이커즈

‘도시에 충격을 준다’는 의미의 어반스트라이커즈는 처음 8~9명으로 시작해 8년 만에 50~70명이 활동하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도시의 악당을 자처하는 이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에게 서울이란 장소를 새로운 관점으로 소개한다. 지지는 이 그룹의 리더다.

그는 대표적인 활동으로 2014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진행한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꼽았다. 건축자재들로 구조물을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쭉한 색색깔 테이프를 줬다. 뼈대가 앙상한 구조물의 원하는 곳에 테이프를 붙여 달라고 했다. 곧 비닐하우스 형태의 터널 하나가 완성됐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도시는 도시계획가가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의 흔적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 낫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 ‘지구의 날’ 행사에선 미세먼지·수질오염·핵폐기물 등을 캐릭터화해 오염대통령선거를 진행했다. 온난화당(지구온난화)·불어라먼지당(미세먼지)·Nu리당(핵페기물) 등 환경재앙 후보들이 유세를 펼치거나 시민들을 위협하는 내용의 퍼포먼스였다. 어반스트라이커즈가 아니면 낼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취향 없는 아파트'가 사람들의 취향과 표현능력 말살해

지지는 어쩌다 이런 조직을 만들게 됐을까. 지난 8년 간 건축설계 디자인을 해온 그는 취향 없는 아파트 구조를 보며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한국 사람들이 아파트를 고를 때 제일 먼저 따지는 게 ‘다시 팔 수 있을지’ 여부예요. 전 재산을 들여 집을 샀으면 다시 팔 수 있어야 하니까 취향이 들어가면 안 되요. 취향이 제거된 집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자라 또 같은 아파트에서 사는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취향과 자기의 공간 그리고 삶을 만들어가고 표현하고 꾸려나가는 능력이 말살당하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봤어요. 이런 문제의식이 어반스트라이커즈 활동의 바탕이 됐죠.”

최근엔 전주에도 어반스트라이커즈의 이름을 내건 그룹이 나타났다. 전주라는 도시를 특색 있게 만들고 싶은 지역 청년들이 모여 ‘어반스트라이커즈 전주’를 꾸렸다.

“각 지역에서도 지역만의 특색이 있어야하는데 모든 지역이 작은 서울 같아요. 지역의 젊은이들도 빠져나가고 사람들도 놀러오지 않게 되죠. 전주만의 특색을 만들고 (도시를) 변화시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였어요.”

■8년간의 회사 생활이 남긴 '바(bar)·갤러리·현실감각'

어반스트라이커즈의 리더 '지지' / 제공=어반스트라이커즈 Photographer: Antonio Martin @projecto0811
어반스트라이커즈의 리더 '지지' / 제공=어반스트라이커즈 Photographer: Antonio Martin @projecto0811

그는 최근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원치 않는 휴식기를 갖게 됐지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회로 삼았다.

“회사를 그만두면 길거리에 나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8년 동안 번 돈들이 ‘지나간 세계’라는 바(bar)와 ‘뱅가드’라는 갤러리로 남아 조금씩 저를 지탱해주고 있는 거죠. 이제 조금씩 수익이 나고 있어요. 지나간 세계 아래층을 싸게 얻어 에어비앤비로 개조해 여행자를 받기도 하구요. 제가 하는 활동들만 보면 이상주의자 같지만 엄청난 현실주의자이기도 합니다. 1년 동안 회사를 다니지 않고 활동해보고,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돈만 들어온다면 회사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물리적인 공간으로 남은 그의 지난 8년은 오롯이 어반스트라이커즈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를 만들어 줬다. 하지만 회사생활이 물리적인 공간만을 남겨준 건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밸런스를 잘 맞춰갔던 것이 저의 엄청난 프라이드였어요. 예술만 계속했으면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게 되죠. (회사 생활 덕분에)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하고 싶은 게 없다고요? 좋아하기로 결정하면 되죠'

이쯤 되니 부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적다. 정작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늘 같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했다.

“저는 한번 결심하고 행동한 다음 후회에 대해선 타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일단 어떤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이걸 하기로 결정한 걸로 생각하고 밀고 나갑니다. 한참을 하다보면 내 것이 돼요. 하다가 안 된다고 해도 결국 제게 남아서 제 한 부분을 구성하게 되죠.

그래서 (누군가 고민을 말하면) 그냥 해보라고 해요. 하고 싶은 게 없으면 일단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는 분야를 정하고 나 자신을 세뇌하는 거예요. ‘나는 원래 이것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이렇게요.

오랫동안 함께 활동한 멤버가 같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요가에 관심이 있다기에 ‘너는 오늘부터 요가인이다. 어딜 가도 요가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해라. 오늘부터 그렇게 정한 거다.’ 이렇게 조언해준 적이 있어요. 그 친구는 지금 요가 강사를 하고 있어요.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었어요. 몇 년이 걸렸죠.”

■'서울이란 도시에 한 획을 그어야죠'

2016년 어반스트라이커즈가 진행한 용문시장 프로젝트. 용문시장 건물 옥상에 직접 시멘트 벽을 쌓고 그 벽에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 제공=어반스트라이커즈
2016년 어반스트라이커즈가 진행한 용문시장 프로젝트. 용문시장 건물 옥상에 직접 시멘트 벽을 쌓고 그 벽에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 제공=어반스트라이커즈

이런 그의 성격을 만든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스케이트 보드를 접하면서였다. 스케이트 보드 영상을 본 고1 지지는 ‘멋있을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집에 있던 낡은 보드를 꺼내 ‘타고 구르고 깨지면서’ 보드를 익혔다. 그러면서 스케이트 보드와 얽혀있는 그래피티·힙합·패션 등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이런 관심은 군대를 마친 뒤 스케이트 보드 웹진에서 웹툰을 연재하고,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를 만나 인터뷰 영상을 만드는 등의 기회로 이어졌다. 이때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결국 스케이트 보드에 대한 관심이 어반스트라이커즈로 이어진 것이다.

서울을 바꾸는 악당들의 리더이자 철저한 현실주의자, 동시에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지지의 꿈은 무엇일까.

“제 꿈은 서울이란 도시에 한 획을 긋는 거예요(웃음), 서울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해주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서울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람이죠. 저로 인해 사람들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직시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가끔 상상합니다. 비디오가게 점원 타란티노를, 차고 안의 잡스를, 아를의 반 고흐를 만나는 순간을요. 연습구장에서 땀 흘리는 메시를, 취재에 치이던 트웨인과 헤밍웨이를 만나는 건 또 어떨까요. 상상만으로도 짜릿합니다. 저도 한 때는 예술에 삶을 걸겠다고 맹세했었지요. 어찌나 즐겁고 괴로웠는지, 얼마나 뜨겁고 슬펐던지를 기억합니다. 꼭 한 번이라도 그 시절 나를 만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기획했습니다.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나 들을 가치가 있는 얘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를요. '플레이어'라 이름붙인 이 길 위에서 애저녁에 떠나가버린 나와 만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건은 오로지 셋입니다. 꿈이 있을 것, 꿈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 매력적일 것. 플레이어가 이름을 얻지 못한다 해도, 필요한 곳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럼 제 인생의 플레이어일, 제 삶 가운데 투쟁하고 있을 멋쟁이 꿈돌이들에게 이 인터뷰를 바칩니다. 지긋지긋한 이 生을, 어디 한 번 살아내 봅시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김성호의 플레이어>에서 더 깊은 인터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co@fnnews.com 안태호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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