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가난, 죄 아냐"..'벌금 미납' 교도소행 막는 장발장은행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03 12:10

수정 2019.06.03 12:10

대출심사를 통해 벌금 미납 등으로 교도소에 갈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구제하는 장발장은행의 출범식이 지난 2015년 2월 25일 서울 장충동 만해엔지오(NGO)교육센터에서 열리고 있다./사진 제공=장발장은행
대출심사를 통해 벌금 미납 등으로 교도소에 갈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구제하는 장발장은행의 출범식이 지난 2015년 2월 25일 서울 장충동 만해엔지오(NGO)교육센터에서 열리고 있다./사진 제공=장발장은행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을 다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서 문을 닫는 게 저희 목표입니다"
장발장은행 운영위원을 맡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3일 "대출금 100만~200만원이 없어 사람이 죽고 사는 현실"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장발장은행은 '가난이 죄'가 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인권연대가 운영하는 사업이다. 불법 촬영 같은 성범죄나 음주운전 등 죄질이 불량한 범죄를 제외한 벌금형을 선고받은 이들을 대상으로 최대 300만원(무이자·납부 기간 1년 내)의 대출 여부를 심사한다.

■660여명, 12억여원 대출
시민 후원으로 운영되는 장발장은행은 2015년 2월 출범 후 지난 4월까지 660여명에게 약 12억여원을 대출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대출금 전액 상환자가 100명을 넘어섰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장발장처럼 생계형 범죄를 저질렀다가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장으로 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벌금 미납으로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례는 연평균 4만여건에 달한다.

오 국장은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대출해 드리겠다고 하면 그 순간 우시는 분들이 있다"며 "그분들은 '살았다'라고 느끼는건 데, 그럴 때 보람도 느끼지만 정말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과거 청년 A씨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손님들이 필요 없어 두고 간 할인 쿠폰으로 삼각김밥을 사다가 뜻하지 않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청년은 사장이 월급을 몇개월씩 미뤄서 고용노동부에 신고했는데, 이에 화가 난 사장이 "할인 쿠폰을 훔쳤다"며 A씨를 절도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A씨는 장발장은행의 도움을 받아 벌금 납부 후 대출금을 상환했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정년 퇴직 후 개인 사업을 운영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신용회복 지원을 받던 중 차량 사고를 일으켜 도움을 받은 사례도 있다.

김모씨는 아르바이트로 홍보용 1t 트럭을 운전하던 중 차량통행 높이 제한 시설물을 들이 받고 지나치다 벌금형이 나왔는데, 납부할 형편이 되지 않아 장발장은행으로부터 대출금을 받았다. 김씨는 대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액을 상환했고, 감사의 의미로 후원금 5만원도 장발장은행에 보냈다.

장발장은행에 고마움을 전한 편지들도 은행 직원들의 마음을 울리고 보람을 느끼게 한다.

근래 장발장은행의 도움을 받은 한 사람은 편지를 통해 "벌금 70만원을 낼 형편이 안돼서 저는 전국 지명수배자가 될뻔 했다. 가족도 건강도 돈도 없는 제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면서도 "하지만 (장발장은행이) 아무 조건 없이 돈을 빌려줬고, 노역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도와줘서 너무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오 국장은 소득과 재산에 따라 벌금을 달리 내는 등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판 장발장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다.

■일수벌금제 도입, 은행 문 닫는 날"
그는 "벌금도 국민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처럼 소득과 재산을 연동해서 다른 액수로 나와야 한다"며 "프랑스·독일·스웨덴 등이 시행하는 일수벌금제가 좋은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일수벌금제는 범행의 경중에 따라 일수를 정하고 피고인의 재산 정도를 기준으로 산정한 금액에 일정 비율을 곱해 최종 벌금 액수를 정하는 제도이다.


오 국장은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형벌의 형평성이라는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며 "장발장은행이 문 닫는 날은 일수벌금제가 도입되는 그때"라고 끝을 맺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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