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와인의 경제학
썩은 포도의 선물, 귀부와인
가론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소테른 마을 전체를 휘감고
가을 햇살을 쬐던 갈라진 포도껍질과 수분이 만나 썩는 과정에서 당도 축적
귀한 곰팡이 핀 포도를 하나씩 골라 압착..벌꿀처럼 달콤하고 톡쏘는 풍미가 일품
매혹적인 황금빛이 해가 갈수록 짙어져 카사노바도 이런 매력에 반했을 지도
썩은 포도의 선물, 귀부와인
가론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소테른 마을 전체를 휘감고
가을 햇살을 쬐던 갈라진 포도껍질과 수분이 만나 썩는 과정에서 당도 축적
귀한 곰팡이 핀 포도를 하나씩 골라 압착..벌꿀처럼 달콤하고 톡쏘는 풍미가 일품
매혹적인 황금빛이 해가 갈수록 짙어져 카사노바도 이런 매력에 반했을 지도
프랑스 보르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소테른( Sauternes) 마을에는 해마다 가을이 오면 '하늘이 주는 선물'이 찾아옵니다. 섭씨 40도까지 올라가던 여름이 가고 햇살이 따가워지기 시작하면 매일 아침에 마을이 온통 물안개에 뒤덥힙니다. 마을 위쪽을 흐르는 가론(Garonne) 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마을 전체를 휘감는 것이죠. 고색창연한 소테른 지역의 아름다운 건물과 뿌옇게 흐려진 포도밭이 마치 파스텔톤 수채화 속 풍경처럼 변합니다. 해가 높아지면서 물안개가 물러가자 어느새 잎사귀 색이 변하기 시작한 포도밭에선 쭈글쭈글하고 색깔도 형편없이 거무튀티하게 변해버린 포도송이가 가을 햇살을 즐기며 잘 여물고 있습니다. 올해도 하늘이 준 선물, '보트리스 시네리아(Botrytis Cinerea)' 곰팡이 균이 잘 내려 앉았습니다. 보트리스 시네리아 균은 포도를 썩게 만듭니다. 이 균은 가론 강에서 발생하는 물안개를 타고 마을 포도밭으로 날아와 껍질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곰팡이의 공격으로 껍질이 연해진 포도 알갱이는 따가운 가을 햇살에 껍질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수분이 '주르륵' 흘러나옵니다. 올해도 풍작입니다.
'마시는 황금', '하늘이 주는 선물', '진짜 신의 물방울'.
프랑스 보르도의 소테른 지역에서 나는 귀부와인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귀부와인이란 이처럼 '귀하게 부패한(Noble Rot)'포도 알갱이를 하나하나 골라 만든 와인입니다. 말이 귀하게 부패했다는 것이지 실제로 보면 쭈글쭈글하고 색깔도 형편없이 변해버려 이 포도로 어떻게 와인을 담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곰팡이 균의 공격으로 쪼그라든 포도 알갱이는 당도가 엄청나게 축적돼 있습니다.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에서 포도를 수확해 바로 압착해 와인을 만들지 않고 대나무 발에 널어 말리며 당분을 응축시키는 아파시멘토 기법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식용으로 즐겨먹는 캠벨 포도의 당분 함량이 12 브릭스 안팎인데, 와인을 만들때 쓰는 까베르네쇼비뇽, 멜롯 등은 26~28 브릭스에 달합니다. 그런데 보트리스 시네리아 균에 감염돼 수분이 빠져나간 포도는 당도가 32~36 브릭스까지 치솟습니다. 꿀의 당도가 40 브릭스입니다. 실제로 소테른의 귀부와인을 먹어보면 독특한 풍미가 일품이지만 무엇보다 혀를 녹일듯한 단맛에 깜짝 놀랍니다. 보트리스 시네리아 균에 감염된 포도를 발효시키면 알코올 도수가 11~14%에 도달해 발효가 멈춰도 와인 속 당분이 14브릭스 이상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단 맛이 나는 것입니다.
소테른의 귀부와인이 만들어진 시기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800년대 초입니다. 샤또 디켐의 소유주인 후작 베르트랑(Bertrand)이 러시아를 여행하다 귀환이 늦어져 포도의 수확시기를 놓쳤다고 합니다. 포도는 하루가 다르게 여물어가고 곰팡이 균까지 감염돼 썩어가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 베르트랑 후작으로부터 수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양조책임자는 어쩔 수 없이 썩은 포도를 압착해 와인을 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압착한 포도즙은 놀라울 정도의 좋은 향기가 나고 달콤하고 진한 맛의 액체가 돼 있었습니다. 귀부와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꿀처럼 달콤한 맛에 강렬한 신맛까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품질의 와인이 나온 것이죠.
와인의 당도가 높다는 것은 당시에 최고 품질의 와인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시는 유럽대륙이 삼각무역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설탕을 수입하던 시기이고 가격도 워낙 비싸서 단 맛이 귀했습니다. 따라서 단 맛이 나는 와인은 거의 금값이었습니다. 아마도 우연히 만들게 된 귀부와인을 맛보며 이들은 엄청난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소테른의 귀부와인은 세미용(Semillon)과 쇼비뇽 블랑(Sauvignon Blanc)으로 만듭니다. 세미용은 보트리스 시네리아 균이 가장 좋아하는 포도입니다. 균에 감염돼 쭈글쭈글해진 세미용에 신선한 과실향이 특징인 쇼비뇽 블랑을 섞어 만드는 와인이 귀부와인입니다. 와인의 색깔도 황금빛으로 매혹적인데다 해가 지날수록 색깔이 짙은 갈색으로 변해가는 독특한 와인입니다.
귀부와인은 가격대가 높습니다. 제대로 썩은 포도알을 일일히 손으로 골라 수확해야 하는데다 가지치기를 많이 해 수확량 자체도 적기 때문입니다. 최고급 귀부와인의 경우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귀부와인 한 잔 정도만 생산합니다. 가히 '흐르는 황금'이라고 불릴만 합니다. 귀부와인은 양조기간이 아주 오래 걸립니다. 포도의 당분이 높아 발효에 걸리는 시간도 길고 발효가 끝나도 오크통 숙성기간이 2년 이상 필요합니다. 따라서 추수한 후 귀부와인으로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3년이 지나야 합니다.
귀부와인의 최고봉은 샤또 디켐(Chateau d'Yquem)입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가 정한 보르도 와인 등급에서 유일한 특1등급(Premier Cru Superieur)을 받은 와인입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과 이탈리아의 카사노바가 사랑했던 와인이기도 합니다. 샤또 디켐에 대해 전문가들은 "혀를 녹일듯 달콤하지만 우아하고 강력한 산미가 균형을 잡아주고 뒤이어 벌꿀향 같이 톡 쏘는 풍미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라고 표현합니다. 가격도 일반 빈티지가 40만원 안팎에 달하며, 그레이트 빈티지의 경우 100만원을 가볍게 넘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귀부와인은 이보다 더 저렴한 10만원 이하의 가격으로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귀부와인은 로코포르 치즈와 잘 어울립니다. 귀부와인의 강력한 단맛과 신맛을 꼬리꼬리한 맛의 치즈가 잘 잡아주기 때문이죠. 샤또 디켐은 아니더라도 오늘 저녁, 귀부와인 한 모금 어떠신지요.
▶다음 편은 '실수와 우연이 빚은 명품와인, 샴페인'이 이어집니다.
김관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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