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프리를 15년간 알고 지냈다. 그는 굉장한 사람이다"
지난 2002년 당시 부동산 재벌이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뉴욕 매거진과 인터뷰에서 제프리 엡스타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는 "그와 함께 있으면 엄청 재미있다. 그가 나만큼이나 예쁜 여성들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의 취향 중 상당수는 어린 여성들이다. 그가 자신의 사회생활을 즐긴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덧붙였다. 트럼프의 평가가 정확했던지 엡스타인은 이달 6일 그의 생에서 두 번째로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를 받고 체포됐다.
겉보기에 단순히 '억만장자 변태'로 보이는 엡스타인은 이제 미국 정치계의 가장 큰 태풍이 됐다. 트럼프와 원수지간인 미국 언론들과 야당은 이번 사건을 정치 스캔들로 보고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으며 엡스타인과 엮였던 인물들은 저마다 그를 모른 척 했다. 이러한 파장은 엡스타인이 미 상류사회의 표본이자 인맥의 핵심이었기에 가능했다.
올해 한국 나이로 67세인 제프리 에드워드 엡스타인은 1953년 1월 20일에 미국 뉴욕 브룩클린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뉴욕시 공원 관리부서의 공무원이었다. 엡스타인은 브룩클린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맨해튼의 명문 단과 대학인 쿠퍼 유니언에 입학했다. 그는 미술과 건축, 공학 전공만 다루는 쿠퍼 유니언에서 물리를 전공했으나 19세 되던 1971년에 자퇴한다. 이후 뉴욕대에 입학했지만 중퇴했다. 엡스타인은 21살 되던 1973년에 뉴욕 부유층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사립 고등학교인 달튼스쿨에서 미적분학과 물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다. 엡스타인을 인터뷰했던 뉴욕매거진은 그가 당시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 등장하는 '존 키팅 선생'같은 이미지였다고 적었다.
엡스타인은 3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미 5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베어스턴스에 입사했다. 뉴욕매거진과 베니티페어 매거진에 따르면 그는 이미 달튼스쿨에서 부터 인맥 형성에 재능을 드러냈으며 그때 쌓은 인맥으로 훗날 베어스턴스 회장에 까지 오르는 앨런 그린버그와 친해졌다. 엡스타인은 베어스턴스에서 옵션 트레이더로 일하면서 28세 되던 해에 파트너 아래 지위인 리미티드 파트너(LP)까지 승진했고 서른이 되던 1982년에 회사를 나와 'J. 엡스타인 앤드 컴퍼니'라는 투자사를 세웠다. 그는 1996년에 회사 이름을 '파이낸셜 트러스트 컴퍼니'로 바꾸고 본사 위치도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옮겼다. 엡스타인은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파이낸셜 트러스트 컴퍼니의 사장이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고객들을 상대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비밀에 쌓여 있으며 일단 그가 부자들의 자금 관리를 전문으로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엡스타인의 고객으로 밝혀진 유명인으로는 글로벌 속옷 브랜드인 빅토리아 시크릿의 모기업, L브랜드의 레슬리 웩스너 최고경영자(CEO) 정도 밖에 없다.
엡스타인은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평범한 월가의 금융인 같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와 투자 감각을 바탕으로 뉴욕 상류 사회에 접근해 어느덧 '사교계 명사'로 거듭났다. 엡스타인의 존재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도 상류 사회를 다루는 매체들의 공이 컸다. 그는 이달 체포 직전에 맨해튼의 호화 연립주택과 뉴멕시코주의 목장, 파리 자택 등 세계 곳곳에 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확인된 것만 6채다. 엡스타인은 차고에 고급 자동차들이 무더기로 가지고 있을 뿐더러 개인용 보잉 727 여객기까지 소유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1980~1990년대에 걸쳐 정치와 연예계, 학계 인사 등에게 접근해 인맥을 쌓았다. 엡스타인과 친했다고 알려진 인사들을 살펴보면 정계에서는 트럼프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영국 앤드루 왕자가 있으며 배우 케빈 스페이시, 197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제럴드 에델만도 엡스타인과 알고 지냈다. 뉴욕타임스(NYT)에 의하면 클린턴은 지난 2002~2003년에 걸쳐 최소 4차례 엡스타인의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돌아다녔다. 베니티페어는 2003년 기사에서 엡스타인이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들을 자신의 비행기에 태우고 다녔다고 전했다. 아울러 NYT는 이달 보도에서 트럼프가 지난 1992년에 자신의 별장인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여성 28명과 엡스타인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고 주장했다.
엡스타인은 2000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세워 학계 등에 거액을 기부했고 1987~2005년 사이에는 연방 선거에 나온 민주당 후보들에게 최소 18만8126달러(약 2억2180만원)를 기부했다. 그는 2002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맥관리에 대해 "나는 정치인이든 과학자든 사람에 투자한다"고 말했다.
신문 연예면에나 등장하던 엡스타인의 소식이 사회면에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였다. 2005년 3월 플로리다주 팜비치 경찰은 자신의 만 14세 딸이 엡스타인의 팜비치 저택에 가서 옷을 벗고 엡스타인에게 '마사지'를 해 주고 300달러를 받았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 경찰은 연방수사국(FBI)과 11개월의 잠복 끝에 엡스타인과 그의 조력자들이 미성년 여성들을 팜비치 저택으로 데려가 마사지를 시키고 대가로 200~1000달러를 줬다고 파악했다. 수사결과 엡스타인의 마사지는 사실상 성추행 및 성폭행이었으며 확인된 여성만 2001~2006년에 걸쳐 36명이었다. 당국은 2006년에 봄에 미성년자와 불법 성관계 및 성추행 등 4건의 혐의를 적용해 엡스타인을 체포했다. 일부 언론들은 체포 이후 추가 취재를 통해 엡스타인이 유명인들에게 자신이 섭외한 여성들을 '빌려'줬고 자신의 저택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미성년자와 유명인과의 성관계를 촬영, 이를 협박용으로 보관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역지 마이애미해럴드는 지난해 11월 보도에서 당시 엡스타인이 자신의 파티를 위해 남미 국가에서 만 13세 여성들을 들여오는 국제 인신매매에도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문은 당시 사건 피해자가 36명이 아니라 80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엡스타인의 재판은 2008년에야 끝이 났다. 그는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주 검찰과 사법 거래를 통해 미성년자 성매매와 성매매 교사 혐의로 1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실제로는 13개월을 복역했다. 엡스타인은 13개월 동안에도 '근로석방' 혜택을 받아 1주일에 6일간, 하루 12시간씩 감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무실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사법 거래의 대가로 피해자 여성들에게 배상하고 추후 피해자들이 민사 소송을 제기할 경우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엡스타인을 상대로 수백만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며 엡스타인은 그때마다 재판까지 가지 않고 합의를 통해 배상금을 지불했다.
미국에서는 당시 검찰이 왜 이토록 관대한 사법 거래를 했는지를 두고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언론들은 검찰과 엡스타인이 유착했다는 설, 엡스타인의 권력자 친구들이 검찰에 압력을 가했다는 설 등을 제기했다. 엡스타인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6일 플로리다주가 아닌 뉴욕에서 또다시 미성년자 성매매 및 이를 모의한 혐의로 체포됐다. 뉴욕주 검찰은 엡스타인이 2002~2005년에 플로리다주와 뉴욕주 등에서 미성년자 성매매 및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엡스타인측 변호사는 검찰이 이미 2008년도에 끝난 사건을 또 가져와서 재탕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만약 엡스타인이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최소 45년의 징역형이 예상된다.
이번 사건이 억만장자의 일탈행위에서 정치스캔들이 된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우선 엡스타인과 유력 정치인들과의 관계가 문제다. 과거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트럼프는 이제 미국 대통령이 됐다. 엡스타인 체포 당시 그의 맨해튼 자택을 수색한 경찰들은 집에서 수백에서 수천장에 이르는 나체 여성들의 사진을 발견했고 사진들이 이름과 번호로 정리된 상태였다고 밝혔다. 현지에서는 엡스타인이 2008년 판결 이후에도 개과천선하지 않았다는 점, 그가 과거 유명인들에게 성접대를 주선했다는 의혹, 트럼프가 이제 미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다는 점을 종합해 권력자들이 얽힌 섹스 스캔들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엡스타인의 맨해튼 자택에서는 배우 우디 앨런,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사진과 클린턴의 서명이 적힌 사진 등이 발견됐다. 트럼프는 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엡스타인 체포에 대해 "나는 그것에 대해 모른다"고 말했다. 클린턴의 대변인도 즉각 성명을 내고 클린턴이 엡스타인의 비행기를 타긴 했지만 클린턴 재단과 관련된 업무를 위한 비행이었고 업무 담당자들도 동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클린턴은 엡스타인이 수년 전 플로리다에서 인정했거나 최근 뉴욕에서 기소된 끔찍한 범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이유는 2008년 사법거래 주선한 당사자가 지금은 트럼프 정부의 노동 장관이라는 점이다. 당시 플로리다주 남부연방지검의 검사장으로 있던 알렉산더 어코스타는 지난 2017년 4월에 노동 장관에 취임했다. 어코스타는 10일 기자회견에서 당시 "우리가 사건을 적절하게 진행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엡스타인과 사법 거래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징역조차 살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금 사실들이 간과되고 있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사건의 범위가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역시 전날 어코스타를 옹호하면서 어코스타가 검사장으로 일할 당시 사법 거래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야당측은 어코스타가 피해자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사건을 졸속으로 처리했다며 그가 즉각 장관직을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엡스타인 사건은 아직까지 의혹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세간의 의심대로 이번 사건이 국제 규모의 스캔들로 발전한다면 내년 재선을 앞둔 트럼프 정부는 치명타를 맞게 된다. 반대로 이번 사건이 정치 가십으로 넘어간다면 오히려 트럼프에게 호재가 될 수도 있다. 의혹 속에 클린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엡스타인의 기부금 대부분이 민주당으로 향했기 때문에 민주당 입장에서는 이미지 손상이 불가피하다.
이제 사건의 방향은 징역 45년을 눈앞에 둔 엡스타인의 입에서 결정 날 예정이다. 그는 단순히 추잡한 성범죄자일까? 아니면 상류사회의 부패를 집도한 희대의 뚜쟁이일까?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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