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올해로 인터넷 서비스 상용화 20주년과 모바일혁명 10주년을 맞았다. 그간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천지개벽의 '온라인 세상'이 현실화됐다. 누구나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공론장'이 마련됐고 때로는 억울한 일을 해결해줄 '현대판 신문고' 역할도 톡톡히 했다. 검색포털, 전자상거래, SNS, OTT 등 기존에 없던 신산업도 만개했다. 반면 역기능도 심각하다. 온라인 공간이 익명성 뒤에 숨어 내면의 증오를 배출하는 '하수구'로 변질되면서 예전같으면 보지 않아도 될 인간 군상의 '민낯'에 여과없이 노출되고 '혐오'가 일상화되고 있다. 무차별적인 '댓글테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혐오문화는 신뢰체계마저 무너뜨려 사회 전체를 멍들게 한다. 사이버 인격살해가 난무하는 무법천지 혐오공화국, 비상구는 없을까.
(서울=뉴스1) 남도영 기자 = "악플 단 인간들 성별 비율이 한녀가 많겠냐? 한남이 많겠냐?"
지난 14일 고인(故人)이 된 연예인 설리(25·본명 최진리)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 기사의 댓글창이 또 다시 '혐오'로 얼룩졌다. 생전 그녀를 괴롭히던 악플을 누가 더 많이 달았는지를 두고 '한남충'(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말)과 '꼴페미'(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말)는 서로를 죄인으로 지목하며 댓글로 증오와 분노를 쏟아냈다.
누군가의 어머니를 '맘충'(육아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라 부르며 벌레 취급하고 어르신들의 약해진 치아를 '틀딱'(노인들을 비하하는 말)이라 조롱하는 사회. '좌좀'('좌파좀비'의 줄임말)과 '수꼴'('수구꼴통'의 줄임말)이 거리로 갈라져 나와 서로를 망국의 근원으로 가차없이 몰아 세우는 지금, 대한민국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혐오의 그물'에 갇혀있다.
알바충(아르바이트생을 비하하는 말), 지방충(지방에 사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 급식충(10대 학생들을 비하하는 말) 등 어떤 집단이든 '-충'만 붙이면 쉽게 '극혐'(극도로 혐오)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렇게 생산된 혐오들은 댓글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개인 미디어 등을 통해 여과없이 일상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인터넷의 어두운 그림자 혐오표현…'일베'로 사회문제화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이 혐오사회가 된 원인으로 '헬조선'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갈 곳 없는 분노를 꼽기도 하고, 군사정권과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잔재,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며 불거진 양극화를 얘기하기도 한다.
이중 빠지지 않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인터넷의 확산이다. 2000년대 초고속 인터넷과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가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사이버 공간은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새로운 '공론장'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은 200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본격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더 많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수록 그에 상응하는 '그림자'도 커져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악성댓글'이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악용해 타인을 공격하는 악성댓글은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회문제로 거론된다.
악성댓글과 함께 인터넷을 오염시키고 있는 다른 원흉은 바로 '혐오표현'이다. 혐오표현은 성별, 인종, 출신, 성적지향, 장애 등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담은 말과 행동을 말한다.
2005년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고 내린 '개똥녀', 2006년 과시성 소비를 하는 여성들을 비꼬는 '된장녀' 등 한때 인터넷에선 '-녀'를 붙인 말들이나 '쩍벌남'(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남자 승객), '김여사'(운전이 미숙한 중년여성) 등의 신조어들이 화제가 되곤 했다. 이는 명백히 차별이나 비하의 의미를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말로 당시 언론 등에서도 자주 쓰이곤 했다. 당시엔 이런 대상들의 몰상식한 행동을 합성사진 등으로 풍자하는 게 인터넷 상의 새로운 유희문화로 자리잡기도 했다.
온라인 상 혐오표현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불거진 건 2012년 '일베'라 불리는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에서 민주화운동, 여성, 세월호 유족, 호남지역 출신 등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글과 자체적으로 만든 비방 용어들을 확산시키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스마트폰을 통해 더 개인화된 인터넷 환경은 대면 환경에선 드러내지 못했던 내면의 증오를 배출하는 '하수구'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놀이처럼 혐오를 표현하던 일베의 용어들은 이전의 인터넷 신조어나 유행어와 똑같이 무비판적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일베의 혐오표현에는 전과 다른 '증오'의 메시지가 짙게 깔려있었고, 주로 온라인 상에서만 이뤄지던 기존 증오표현의 양상과 달리 일부 오프라인 상 행동까지 이어졌다는 특징을 보였다.
일부 일베 회원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하던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피자·치킨을 먹으며 '폭식투쟁'을 하는 등 사회적 공감대가 결여된 모습을 나타냈고, 이런 증오표현이 결국 끔찍한 증오범죄로까지 이어진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극도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온라인을 타고 확산한 혐오표현, 청소년에게 무방비 노출
인터넷 공간에서 이뤄진 혐오표현은 걸러지는 과정 없이 무차별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전파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이런 혐오의 메시지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포함한 전 연령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댓글과 다른 온라인 공간으로 퍼나르기를 통해 사라지지 않고 영구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인권위원회가 지난 3월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혐오표현 경험과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4.2%가 혐오표현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대는 80.7%에 달하는 등 연령이 낮을수록 경험률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혐오표현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온라인 환경에 자주 노출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인권위가 지난 5월 청소년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68.3%가 혐오표현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이들 중 82.9%는 SNS나 커뮤니티, 유튜브, 게임 등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을 접한 것으로 조사됐다.
성인의 경우 혐오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응답자 10명 중 1명(9.3%)으로 일부가 혐오표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청소년의 경우 4명 중 1명 꼴인 23.9%가 혐오표현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사용 이유에 대해서도 '재미나 농담', '남들도 사용하니까'라는 응답이 과반수를 넘어 증오표현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강문민서 인권위 혐오차별대응기획단장은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혐오표현의 문제를 드러내고 이를 시정하는 것은 우리사회가 당면한 과제"라며 "최근 독일,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은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을 근절하기 위한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돈벌이'가 된 혐오…통제 벗어난 개인 미디어 플랫폼
"오늘은 그동안 맘충으로 논란이 되었던 짤(사진)을 모아봤습니다. 이 영상이 좋았다면 '좋아요' 와 '구독' 버튼을 눌러주세요."
유튜브에 '맘충'을 검색하자 '논란이 된 맘충 사건 모음전 탑20', '진상 맘충 역대급 대실수', '개념없는 맘충의 최후' 등 혐오를 부추기는 동영상 콘텐츠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동영상 아래에는 "쟤들 죽일수 있는 법 좀 만들어달라", "저런 X들이 키운 자식은 커서 이 사회의 쓰레기가 된다"는 등 입에 담기 어려운 과격한 댓글들이 달렸다.
온라인 환경 변화에 따라 혐오표현도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가며 사이버 공간에 파고들고 있다. 최근 혐오표현은 글과 사진 등을 통해 표현하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동영상 플랫폼으로 급속히 넘어오는 추세다. 동영상으로 표현된 혐오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무언가 보여주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특히 과거 혐오표현이 주로 익명성에 숨어 분노나 증오를 배설하는 수준이었다면, 현재 유튜브 등을 통한 혐오 동영상 콘텐츠는 수익을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혐오를 '팔고' 있다는 점에서 더 자극적이고 위험할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 2017년 '갓건배'라는 아이디의 유튜버가 키 작은 남성에 대한 혐오 발언을 올리자 다른 남성 유튜버가 "(후원금) 20만원이 모이면 바로 (갓건배를) 찾아가 죽이겠다"며 살해협박을 한 뒤 실제 그의 집을 찾아 나선 사건이 있었다. 당시 신고를 받은 경찰이 나선 탓에 실제 범죄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혐오 동영상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사례로 남아있다.
최근 유튜브 등 개인방송은 기존 대중매체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플랫폼 업체의 자율규제 외에 이런 혐오표현을 걸러낼 뚜렷한 기준이 나 규제가 없어 많은 부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외국계 서비스인 유튜브의 경우 올해 국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심의·의결한 불법·유해 콘텐츠 352개에 대해 시정 요구를 받고도 83.5%는 여전히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등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구글 측은 인공지능(AI) 등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부적절한 콘텐츠를 걸러내고 있지만, 1분마다 500시간 분량의 영상이 올라오고 있어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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