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유전자 검사 결과 아버지와 자식의 유전자가 다른 것으로 확인된 경우에도 민법상 친생자로 추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부부가 동거를 하지 않은 경우에만 친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행 판례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남편이 동의해 제3자의 유전자에 의한 인공수정이 이뤄진 경우 그 자녀에 대해선 출생과 동시에 안정된 법적 지위를 부여돼야 한다는 현행 친생추정 규정의 목적이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선 여전히 필요하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3일 A씨가 자녀 둘을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각하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남편인 A씨와 부인 B씨는 A씨의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자 1993년 다른 사람의 정자를 사용해 인공수정으로 첫째 아이를 낳은 뒤 두 사람의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이후 1997년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무정자증이 치유된 것으로 착각한 A씨가 이번에도 부부의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마쳤다.
그러나 2014년 가정불화로 아내와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둘째 아이가 혼외 관계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A씨는 두 자녀를 상대로 친자식이 아니라며 소송을 냈다. 법원이 시행한 유전자 검사결과에서도 두 자녀 모두 A씨와 유전학적으로 친자관계가 아닌 것이 확인됐다.
1심은 종전 대법원 판례에 따라 A씨가 무정자증 진단을 받았다는 사정 외에는 다른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 소송이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사건을 심리하지 않고 각하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1983년 '부부가 동거하지 않은 등의 명백한 외관상 사정이 존재한 경우에만 추정이 깨질 수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
2심은 첫째 아이의 경우 A씨가 인공수정에 동의해 소 제기가 부적법하다고 봤고, 둘째 아이는 친생자 관계는 아니지만 입양의 실질적 조건을 갖췄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친생추정 규정의 문언과 체계, 민법이 혼인 중 출생한 자녀의 법적 지위에 관해 친생추정 규정을 두고 있는 기본적인 입법 취지와 연혁,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혼인과 가족제도 등에 비춰 인공수정 자녀에 대해서도 친생추정 규정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남편의 동의는 인공수정 자녀에 대해 친생추정 규정을 적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므로 남편이 나중에 자신의 동의를 번복하고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이번 사건에 대해 일각에선 “혈연관계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인정된 경우에 기간 제한 없이 소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과학기술 발달로 진실한 혈연관계를 판단하는 게 손쉬워진 만큼 대법원도 사회적 변화를 반영해 친생 추정의 예외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태어난 자녀를 불안정한 상태에 두는 것은 자녀의 복리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는 만큼 친생추정 제도 근간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논란이 일자 대법원은 이 사건을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심리해왔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