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낯선 선생님 한분이 나타나 호루라기를 불며 구령을 부치는데, 그 모습이 하도 엄해 우리는 벌벌 떨었지요. 정말 호랑이 선생님이 오셨구나 하면서요."
고(故)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초등학교 은사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남겼다. 그 '호랑이 선생님'은 14일 작고한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다.
이날 94세를 일기로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에게는 경영인으로서 회사에 몸을 담기 전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구 명예회장은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근 지수초등학교 4학년을 다닐 시절 구 명예회장은 과학과 접목한 농경법을 가르친 고 옥태선 선생님께 깊은 영향을 받아 장래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지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를 거친 구 명예회장은 꿈을 이루기 위해 1944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했다.
구 명예회장은 1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진주 지역의 한 소학교로 발령받았는데 학교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당시 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구 명예회장의 부친인 구인회 회장에게 일본군에 기증할 경전투기 구입을 위해 기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부임 첫날부터 구 명예회장은 찬밥신세를 당했다. 부임 첫날부터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그를 대했고 자리고 구석자리에 배정받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교사가 됐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한 구 명예회장은 출근을 포기하고 귀향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한동안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가꾸던 구 명예회장은 다행히 모교였던 지수초등학교에 부름을 받아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 후에는 농사일을 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지수초등학교에서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3년을 교직에 몸담게 된다.
이중 지수초등학교 시절 구 명예회장은 규율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 무질서했던 학생들을 바로잡기 위해 무섭게 호통치는 '호랑이 선생님'이 됐다. 구 명예회장은 신 전 국회부의장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후에 듣고는 "내가 정말 그렇게 무서웠나 싶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평소 구 명예회장은 "만일 내가 기업가로 변신하지 않았다면 교직을 천직으로 삼았을 것"이라며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까지 교편을 잡았던 5년여의 세월은 구 명예회장이 LG그룹의 회장에 오른 이후에도 영향을 줬다. 어떤 경영인보다 '교육'과 '인재 육성'의 중요성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구 명예회장은 1970년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뒤 1973년 연암학원을 만들었으며 1974년에는 연암축산원예전문대학, 1984년 연암공업전문대학을 차례로 설립했다.
LG그룹은 구 명예회장이 취임한 이후 1970년부터 학업 성적이 우수하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등록금과 교재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2001년부터는 그 대상을 대학원생까지 확대했다. 더불어 1989년부터는 해외에서 연구하고 있는 교수진들을 선발해 연구 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또 구 명예회장은 부친과 함께 살았던 서울 종로구 원서동 사저를 기부해 공공도서관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로써 1996년 모든 문헌 자료를 디지털화한 국내 최초의 전자도서관인 'LG상남도서관'이 개관했다. 상남도서관은 2006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세계 최초로 유비쿼터스 기술을 활용한 음성도서 서비스인 ‘책 읽어주는 도서관’을 구축하기도 했다.
이렇듯 구 명예회장은 '교사'로의 소명을 기업인이 되고서도 버리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1988년 11월 LG그룹의 종합 연수원인 인화원 개원식에서 "인재육성은 기업의 기본 사명이자 전략이요, 사회적 책임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LG그룹에 따르면 구 명예회장은 생전 '우물 안에 큰 고기가 없고 새로 가꾼 숲에는 큰 나무가 없다'는 옛말을 강조해왔다. 현재도 LG그룹은 구 명예회장의 유지는 대를 이어 경영인들에게 계승돼 사람을 중시하는 문화를 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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