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기소도 늘어날 듯
최근 블록체인 뉴스를 보면 제목에 ICO(암호화폐공개)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예전에 ‘ICO 열풍’이 불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ICO로 얼마를 조달했다는 뉴스가 아니라 ICO로 모은 돈 가운데 얼마를 투자자들에게 돌려주라는 판결 혹은 징계를 받았다는 뉴스라는 점이다.
지난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2018년에 진행된 2건의 ICO를 ‘미등록 증권 판매’로 규정하고 증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해 법정으로 끌고 갔다. ICO를 통해 판매한 토큰은 디지털 자산 증권임에도 담당 규제기관인 SEC에 신고하고 허락받지 않았으므로, 현행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해당 사건과 관련된 개인과 기업들은 현재 벌금을 포함한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SEC는 두 ICO에 관해 법원의 판결과 관계없이 조달한 금액을 전부 투자자에게 돌려주라고 권고했다.
ICO벤치(ICOBench)에 따르면 지난 2014년 7월부터 지금까지 총 5700여 개 ICO 프로젝트가 있었다. 2월 6일까지 ICO를 통해 조달한 금액을 모두 더하면 270억 달러가 넘는다. ICO는 암호화폐 스타트업이 사업 초반에 제품 출시를 앞두고 자체 토큰을 일정량 판매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ICO와 유사한 개념으로 ‘암호화폐거래소공개(initial exchange offering, IEO)’가 지난해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IEO는 거래소의 자체 토큰을 판매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현재 SEC에 등록하지 않고 미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토큰을 팔아 투자금을 모으는 행위는 모두 연방 증권법 위반에 해당한다. 법을 어기면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지난달 SEC는 개인과 기업들을 대상으로 ICO를 진행하거나 참여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경고한 바 있다.
헤스터 퍼스 SEC 위원은 최근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사업 초기에는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디지털 자산인 토큰을 증권이 아닌 자산으로 개발할 때까지 증권법 적용을 3년간 유예해주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퍼스 위원의 제안과 무관하게 ICO 관련 기소 건수는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2016~2020년 SEC는 자금 조달을 마친 ICO 27건을 미국 법원에 기소했다. 여기에는 SEC가 조사하고 있는 ICO나 법정까지 가지 않고 합의한 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렇듯 SEC가 강력한 규제와 징계를 행동에 옮기면서 ICO에 참여해왔거나 참여할 계획이 있던 암호화폐 투자자들은 더욱 몸을 사리고 있다. ICO벤치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8년 월 34억 5천만 달러를 기록했던 ICO 조달 자금이 2019년에는 월 1800만 달러 수준까지 급락했다.
■SEC의 처벌 방식
스미스앤크라운(Smith and Crown)이 집계한 데이터를 보면, SEC가 기소한 토큰 판매 대부분은 ICO 열풍이 불었던 2017년 체결된 거래들이다. 2017년 한 해에만 550건 이상의 ICO를 통해 73억 달러의 자금이 모였다. 2014년 5월 체결된 ‘시아노트(Sianotes)’는 당시 토큰을 팔아 12만 달러를 조달했지만, SEC의 처벌을 받은 첫 토큰 판매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2016년 ICO를 진행한 네뷸러스(Nebulous)는 시아노트를 판매해 모은 금액을 전부 다 투자자들에게 돌려줘야 했을 뿐 아니라 판결 전 이자 24602달러와 선고된 벌금 8만 달러까지 내야 했다.
SEC가 미등록 증권을 판매한 기업에 주로 사용하는 금전적 무기 3가지는 이익 환수금, 민사상 선고되는 벌금, 그리고 판결 전 이자다.
‘이익환수금’이란 SEC가 불법 또는 비윤리적 행위로 얻었다고 판단한 이익을 투자자에게 반환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징벌적 과징금이라기보다는 부당하게 누린 이익을 정당하게 투자자에게 돌려주는 성격을 띤다.
반면 ‘민사상 벌금’은 잘못에 대한 처벌적 성격을 띤다. 사기의 명백한 증거가 있거나 투자자가 받을 만한 상당한 위험 또는 실제 투자자에게 해를 가했을 경우 최고 벌금형에 처한다.
마지막으로 ‘판결 전 이자’는 재판 과정에서 협상한 이익환수금과 민사상 벌금 액수를 기반으로 계산한 금액이다.
SEC는 또 연방 증권법을 위반한 사람을 증권업계에서 일하지 못하게 하거나 공기업의 임원 또는 고위직을 맡을 수 없도록 금지함으로써 연방 증권법을 위반한 데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하지만 SEC에 징역형을 내릴 권한은 없다.
■대표 사례
그동안 SEC에서 ICO를 진행한 기업과 개인을 대상으로 부과한 징벌적 과징금을 살펴보면, 우선 액수는 0~2400만 달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SEC는 민사상 벌금을 부과하지 않을 때는 판결문에 그 논거를 명시하며 해당 기업이나 개인이 이미 법을 어긴 데 대해 개선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일례로 네바다주에 있는 사이버안보 서비스 기업 글래디우스(Gladius) 기소 건에서는 해당 업체가 자진 신고를 위해 ‘신속한’ 개선 조치를 취했고, SEC의 조사에 최대한 협조했으며, 향후 연방 증권법을 성실히 준수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명시돼 있다.
ICO 기소건 중 SEC가 역대 최고 금액의 민사상 벌금을 매긴 사례는 블록원(Block.One)이었다. 블록원은 토큰 판매로 당시 기준 역대 최대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다. 2017년 6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이른바 ‘상시 판매’를 통해 ERC-20 규정에 따라 만든 자체 토큰 EOS를 41억 달러어치 팔았다. SEC는 2019년 9월 EOS를 미등록 증권으로 규정하고, 블록원에 24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물론 민사상 벌금의 액수가 반드시 조달한 자금의 규모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명확한 룰은 없다’
증권 전문 변호사 마크 헌터는 SEC가 처벌 대상을 선정하고 벌금 액수를 결정하는 데 있어 총 조달자금 말고도 고려하는 요소가 여러 가지라고 말했다. 그중 몇 가지를 꼽자면, 피해자와 범법자들이 어느 지역에 있는가, 토큰 판매의 표적이 된 식별 가능한 그룹이 있는가, 그리고 해당 기업이나 개인 또는 제품이 뉴스거리가 되는가 등이다.
헌터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ICO라는 이유로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던 블록원 등을 언급하며 “그들(회사 또는 개인)이 그달 또는 그 분기의 가장 큰 화제가 됐는지”가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결국 SEC가 처벌 대상을 정하고 처벌을 내리는 과정에는 명확한 룰 같은 건 없다. 분명히 SEC의 처벌 명단에 오를 거라고 확신하던 개인이나 기업이 처벌을 받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반면 SEC가 주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처벌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이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유능한 변호사일 거다.” -마크 헌터, 증권 전문 변호사
■올해는?
SEC 올해 들어 이미 2건의 ICO를 기소했다. 이 두 건의 이익환수금, 민사상 벌금, 판결 전 이자 액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SEC가 ICO에 대한 조사를 비공개로 진행하는 만큼, 현재 진행 중이거나 향후 진행될 SEC의 ICO 조사 시기와 진행 상황 등은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과거 기록에 비추어 전망하자면, 올 한 해 기소 건수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SEC의 처벌을 받는 ICO 건수가 증가할수록 투자자들로서는 규제를 얼마나 철저히 준수하느냐가 중요해진다. 텔레그램(Telegram)과 킥(Kik) 등 지난해 계속해서 언론에 등장한 ICO 기소 사건이 블록체인 기술, 소비자 시장과 관련해 미국의 규제심리에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또한 퍼스 위원이 제안한 ‘토큰 판매 피난처’가 실제로 정책이 되어 집행될지도 규제 당국이 시장에 보내는 중요한 신호로 읽힐 것이다.
올해 SEC가 취할 새로운 조처들은 ICO를 통한 자금 조달과 사업 모델, SEC 규제의 초점에 관해 많은 교훈을 줄 것이다. 그리고 암호화폐 시장 내 신규 ICO와 IEO, 그리고 다른 형태의 금융 혁신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2016년부터 2020년 1월 31일까지 SEC가 기소한 ICO의 목록은 코인데스크 기사 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코인데스크코리아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