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특별기고

[특별기고] 한은의 역할, 의지가 더 중요하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5.03 17:11

수정 2020.05.03 17:11

[특별기고] 한은의 역할, 의지가 더 중요하다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회의에서 매번 파격적인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당에서 한국은행법 개정까지 검토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국은행이 회사채를 직접 매입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씁쓸하다.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한은이 보여준 조치들이 미흡하다는 판단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행 한은법에는 큰 문제가 없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가능한데 한은이 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 회사채 매입에 관해서는 한은법이 훨씬 진보적이다.
미국 연준법(제14조)은 금, 국채, 정부보증채, 전신환(외국환), 상업어음 등 안전하거나 실물경제와 직결되는 유가물만 매입을 허용한다. 회사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한은법(제68조)은 특수채나 우량 회사채까지도 매입을 허용한다.

한국은행이 저신용등급 회사채까지 매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중앙은행의 재무건전성이 악화돼 자본잠식에 이른 태국, 체코,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칠레, 우루과이, 페루 등을 연상케 한다. 중앙은행의 유가증권 매입은 대출보다 엄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수해를 당한 사과장수를 돕겠다고 썩어가는 사과를 사서는 안 된다. 사과장수한테 살 만한 사과가 없다면 깨진 장독이나 찌그러진 가재도구라도 담보로 잡고 대출해야 한다. 그래야 대출자로서 이듬해 농사를 독려하거나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중앙은행을 최종매수자가 아닌 최종대부자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다. 그것이 한은법 제65조와 제80조 그리고 연준법 제10조B와 제13조(3)의 취지다. 한은법을 고치려면 비상시 영리기업(비은행) 여신에 관한 기본설계부터 다듬어야 한다. 미국은 영리기업 여신을 위해 정부와 연준이 협업한다. 영국은 영란은행(중앙은행)이 금융기관까지만 책임지며, 영리기업 구제는 정부가 담당한다. 일본은 일본은행이 주식이나 회사채까지 닥치는 대로 매입한다.

한국은 어떤 모델을 택할 것인가. 우리나라에는 정부 산하의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있고, 금융위기 때는 민간자본으로 각종 안정기금이나 펀드를 조성한다. 가끔씩 한국은행이 펀드 조성에 끼어들기도 한다. 다른 나라보다 금융경색을 자주 겪으면서도 뚜렷한 원칙과 얼개가 없다. 이것을 무시하고 한은법만 손보는 것은 덧없다. 물론 한은법에도 손볼 내용이 있다. 중대한 과실로 인해 한국은행에 손해를 끼친 경우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것(제25조)이 대표적이다. 한국은행의 정보접근성도 개선돼야 한다. 연준과 일본은행은 은행감독권 또는 은행조사기능을 갖고 있어서 은행과 금융시장 사정을 꿰뚫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행은 자신이 대출해 준 은행도 찾아가서 조사할 수 없다.

한국은행 스스로도 개선할 점이 있다. 월터 배젓이 말한 대로 최종대부자는 신용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은행은 최종대부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항상 신용리스크 최소화에 골몰했다. 최근 도입한 '금융안정특별대출제도'도 아쉬움이 크다. 증권·보험사에 대한 대출은 틀림없이 최종대부자 역할(한은법 제80조)인데, 거기에 일상적 은행여신(제64조)이 섞여 있다.
제도의 철학이 없다. 한국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은 법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지와 철학의 문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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