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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간송미술관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5.21 16:46

수정 2020.05.21 16:46

한양도성 북쪽 동네 서울 성북동. 이 일대엔 유난히 한국 근대 예술가들의 흔적이 짙다. 만해 한용운이 머물렀던 심우장, 소설가 이태준의 고택, 미술사학자 최순우 옛집이 이 근처 골목길에 숨어있다.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이 세운 한국 최초 사립미술관 간송미술관도 여기에 있다. 1938년 처음 문을 열 당시 이곳 이름은 보화각이었다.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붙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혜원 신윤복 풍속도화첩 같은 국보급 문화재 5000점을 소장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의 문화재는 청년 전형필(1906∼1962)의 피와 땀, 집안의 막대한 재력으로 지켜진 것들이다. 간송이 우리 문화재 수집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세살 때다.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고희동이 그의 고교 스승으로 간송의 초기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사재를 털어 문화재를 사들였는데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증조부부터 지금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의 모태인 배오개시장 거상이었다. 그 재력으로 전답을 구입해 1년에 거둬들인 쌀이 당시 기와집 150채를 사고도 남았다고 한다. 이를 물려받은 간송은 10만석지기, 국내 자산서열 10위 안에 꼽힐 정도였다. 상속금은 일본에 유출될 뻔한 문화재를 다시 되찾아오는 데 썼다. 영국인 미술품 수집가 존 갓스비로부터 고려청자 컬렉션을 인수할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대대로 내려오던 공주 전답을 팔아 40만원을 지불했다.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

국고보조금 한푼도 없었던 미술관은 간송 이후 장남과 차남, 장손 등 3대로 이어지면서 재정난을 겪었다.
급기야 국가보물로 지정된 금동 불상 2점이 27일 열리는 케이옥션 경매에 나온다고 한다. 2년 전 간송의 장남 전성우 재단이사장 타계 후 부여된 막대한 상속세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이 같은 결정을 했다.
전 재산을 털어 지킨 문화재가 상속세 때문에 경매로 팔리다니. 우리나라 상속세 최고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2배 정도 된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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