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을 길 끝에서 만난 노송 우거진 언덕. 묘 앞에는 아무 글씨도 없는 흰 비가 서있다.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청백리로 꼽히는 박수량 (1491~1554) 선생의 백비다. 조선시대 한성부판윤과 호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공직생활을 했지만 뇌물은커녕 밥 한 그릇, 술 한 잔 얻어 마시지 않을 정도로 청빈했다. 그가 죽은 후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명종은 장례비와 함께 비석을 하사하며 “어설픈 글로 비문을 새기는 게 오히려 누가될 수 있으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고 명했다 한다.
박수량의 청렴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대적 배경에 있다. 16세기 당시 조선의 양반 관료는 단순히 한 집안의 가장을 넘어 가문을 책임지는 어른이었다. 고위 관료가 되면 상당한 규모의 친족집단을 보살펴야 했는데,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거나 가까운 친척 중에 벼슬한 사람이 없으면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절에 박수량은 공직자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가난함은 물론 일가로부터 숱한 원망을 듣는 일까지 감수하는 삶을 지켜낸 것이다.
그렇다면 박수량이 이토록 청렴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요즘의 평가로 치자면 탄탄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높은 자존감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자존감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식은 뚜렷하고 분명한 자기 윤리를 갖는 것이다. 박수량이 관직에 있는 30여 년 동안 청렴한 생활을 꼿꼿이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선택지 앞에서도 높은 도덕성으로 합리적인 판단과 책임을 갖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내가 진정으로 올바른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내면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그때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놓여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공직자로서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할 자존감이라면, 청렴을 꼽는다. 청렴은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직자는 다양한 업무 환경 속에서 과거보다 부정청탁에 노출될 기회가 더욱 많다. 직원 개인 스스로가 자존감을 높여 청렴 의무를 지켜나간다 하더라도 사회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 부조리의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공공기관들은 직원 개개인에게 청렴이 확고히 뿌리내리도록 함과 동시에 자체 평가 등을 통해 청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도 꾸준히 힘쓰고 있다.
지난해 한국농어촌공사에서도 조직 내 청렴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직원들은 청렴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계약’업무가 가장 개선되어야 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가 점검 체크리스트’를 꼽았다.
현재 공사는 계약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정치 않게 진행되거나, 상급자의 부당한 업무지시가 있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진단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공정한지, 공동체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개인의 행동에 대한 자율성과 실행력을 높이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앞으로도 꾸준히 실행 여부를 점검해 나가면서 나머지 취약 분야에 대한 체크리스트 적용 여부를 점차 확대시켜 직원 스스로의 자정 노력을 일깨우는 환경을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의 백비,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묘비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 청렴의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 체크리스트가 아닐까 싶다. 오백여년이 지난 뒤에도 후대에게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 것인지, 뚜렷한 목표 없이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오늘 나에게 하는 질문에 달려있다. 박수량 선생의 삶을 닮아 하얀 백비처럼 우리 마음의 깨끗한 도덕성이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고 깨끗한 청렴사회로 거듭나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조익문 한국농어촌공사 상임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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