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은 사건 내막과 진상을 위주로 시대적, 역사적 흐름에 따라 적어 내려간 글이다. 정치적으로 서슬 퍼렇던 1980년대 '김형욱 회고록'이 유명세를 탄 적이 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박정희 정권 2인자였지만 미국 망명 후 회고록을 통해 독재정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가 행방불명됐다.
전두환 회고록은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통치이념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가 역사적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박근혜정부 국정농단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최서원씨(개명 전 최순실)는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과 주장을 담은 옥중 회고록을 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최근 메모광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으로 온 세계가 시끌시끌하다. 볼턴은 한미·북미·미중 간 민감한 외교이슈와 관련된 기밀성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비핵화 구상을 놓고 '조현병 환자'로 비유하는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회고록이니 내용이야 어떻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품격과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의 최고위급 참모를 지낸 이가 민감한 외교적 현안을 여과 없이 쏟아낸 것도 당혹스럽다. 당장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사실을 크게 왜곡했다"며 협상 신의를 훼손했다고 우려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는데 이 작품으로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런 고품격 회고록은 앞으로 영영 볼 수 없는 걸까.
haeneni@fnnews.com 정인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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