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익산 금관의 후예’…“일본 귀금속 시장 자본 아닌 몸으로 일군 31년”

김도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7.28 19:56

수정 2020.07.28 19:56

재일한국인 30여년 땀이 보석이 되다
1세대 도쿄 오카치마치에 집단 이뤄
“한인 손 거치지 않는 귀금속 없다”
재일본 익사모 70여명으로 결성 
어려울 때 단결하는 한국인 힘 
재일한국인 귀금속협회 건물 구입
김경진 재일한국인귀금속 협회장 
도쿄 전북인들 전북도와 교류원해
김경진 재일한국인 귀금속연합회 6대 회장은 1989년 홀로 일본에 와 도쿄에 정착한 금관의 후예다. 김 회장은 처음일본회사에 근무하고 1995년 (유)금공예를 설립해 지금까지 많은 장인들을 배출했다. 재일한국인 귀금속 협회 창립에 참여해 지금까지 한국인 권익에 앞장서고 있다. 김 회장은 "도쿄에 전북출장소가 생기면 전북하고 민간교류 뿐 아니라 다양한 교류를 할 수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전북 익산 웅포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이곳에 계신다.
김경진 재일한국인 귀금속연합회 6대 회장은 1989년 홀로 일본에 와 도쿄에 정착한 금관의 후예다. 김 회장은 처음일본회사에 근무하고 1995년 (유)금공예를 설립해 지금까지 많은 장인들을 배출했다. 재일한국인 귀금속 협회 창립에 참여해 지금까지 한국인 권익에 앞장서고 있다.
김 회장은 "도쿄에 전북출장소가 생기면 전북하고 민간교류 뿐 아니라 다양한 교류를 할 수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전북 익산 웅포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이곳에 계신다.

【파이낸셜뉴스 익산=김도우 기자】 일본 고가 귀금속 대부분이 도쿄 한복판에 자리 잡은 재일동포 장인들 손을 거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금관의 후예다운 장인 정신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일본 도쿄 우에노 귀금속 시장을 평정한 사람들이 있다.

김경진 유한회사 금공예(金工藝), ㈜다이끼 대표이사도 그중 한사람이다.

전북 익산 웅포 출신인 김 회장은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89년 혼자 일본으로 건너간 김 회장은 30년 만에 일본 귀금속 시장에 굳건하게 뿌리 내렸다.

장인들이 많은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두 세배 열심히 일했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 했다.

김 회장처럼 30년 전 도쿄에 정착하기 시작한 금관의 후예들은 타고난 성실성으로 일본 귀금속 시장 80%를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김 회장하고 연결된 사람들이 많다. 김회장과의 인연으로 전북 익산 출신 선후배 등이 일본을 건너와서 그들이 집성촌을 만들었다.

재일본한국인귀금속연합회는 도쿄 오카치마치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일본 전체 80%이상 귀금속은 모두 여기손을 거쳐야 한다. 이들은 권익보호와 권리를 위해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2004년 재일본 익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익사모)을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재일본한국인귀금속연합회는 도쿄 오카치마치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일본 전체 80%이상 귀금속은 모두 여기손을 거쳐야 한다. 이들은 권익보호와 권리를 위해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2004년 재일본 익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익사모)을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4년 재일본 익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익사모)이 설립되었다. 약 70여명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70년대 당시 이리수출자유지역에서 생산되는 귀금속 제품들이 전 세계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한 때 익산은 귀금속 장인들이 모여 호황을 이뤘다.

90년대부터 수출저조와 내수침체가 이어졌다. 때마침 일본의 귀금속 인력부족으로 취업비자가 발급되면서 익산공단 기능공들은 일본으로 모이게 된다.

이것이 발전되어 1999년 ‘재일한국인 귀금속협회’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현재 1,000여명의 가족과 함께 도쿄 오카치마치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일본 도쿄 귀금속 세공업거리인 오카치마치에 집단을 이루어 삶의 터전으로 삼고 30년 넘게 귀금속 세공을 업으로 꾸준히 한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한국인 귀금속 세공전문가들의 삶의 애환과 희로애락, 그리고 지치지 않는 희망에 관한 스토리에 김경진 회장이 중심에 있다.

익산 금관의 후예들은 일본 도쿄 귀금속 세공업거리인 오카치마치에 집단을 이루어 삶의 터전으로 삼고 30년 넘게 귀금속 세공을 업으로 꾸준히 한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들 한국인 귀금속 세공전문가들의 삶의 애환과 희로애락, 그리고 지치지 않는 희망에 관한 스토리가 있다. 이들은 서로 신뢰와 우정을 중요시 하며 한글학교, 회원가족 단합대회 등 한국인 출신을 위해 단합을 하고있다.
익산 금관의 후예들은 일본 도쿄 귀금속 세공업거리인 오카치마치에 집단을 이루어 삶의 터전으로 삼고 30년 넘게 귀금속 세공을 업으로 꾸준히 한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들 한국인 귀금속 세공전문가들의 삶의 애환과 희로애락, 그리고 지치지 않는 희망에 관한 스토리가 있다. 이들은 서로 신뢰와 우정을 중요시 하며 한글학교, 회원가족 단합대회 등 한국인 출신을 위해 단합을 하고있다.

현재 일본 시장에서 제작되는 귀금속 제품은 이들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본 현지의 반응이다.

재일한국인 세공전문가들은 기술이 좋고 손이 빨라서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밀기술에서 세계 최첨단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한국인들의 손기술이 인정받고 있다는 뜻인데 한국 세공인들이 지난 30여년간 눈물과 땀으로 쌓아 만든 성취다.

그 시작이 순탄했을 리가 없다.

초기엔 한국인에 대한 인지도와 대우가 모두 좋지 않았고 작업환경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는 것이 김경진 회장을 포함한 오카치마치 1세대의 한결같은 회고다.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이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김 회장도 마찬가지다. 1990년 일본회사에 근무하며 갖은 수모와 힘겨움을 이겨내야 했다.

김 회장은 1995년 (유)금공예를 설립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으며 재일한국인 귀금속협회 창립멤버로 임원, 이사, 부회장, 회장을 역임, 현재는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다.

성실하고 우직하게 오로지 한길만 보고 다이아몬드 커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전북 이리(현재 익산) 지역에서 일본의 주문을 받아 귀금속을 세공해 수출하던 업체의 세공인들이 “수출하는 것보다 일본 현지에서 직접 주문을 받아 제작하고 바로 애프터서비스를 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면서 하나둘씩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이곳 오카치마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전북 이리(현재 익산) 지역에서 일본의 주문을 받아 귀금속을 세공해 수출하던 업체의 세공인들이 “수출하는 것보다 일본 현지에서 직접 주문을 받아 제작하고 바로 애프터서비스를 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면서 하나둘씩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이곳 오카치마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오카치마치의 한국인 귀금속 세공업체는 일본 도쿄 한복판, 우에노 옆에 밀집해 있다.

이곳에는 약 500명의 한국 세공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귀금속 세공을 한다.

오카치마치는 일본 에도시대부터 귀금속 관련 장인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이곳 오카치마치의 한인 세공인들은 금, 백금, 다이아몬드, 오팔, 사파이어 등의 귀금속으로 반지, 목걸이, 펜던트 등을 만들어 긴자의 고급 매장에 납품한다.

귀금속 세공은 새끼손톱처럼 비교적 큰 보석부터 지름 0.1 밀리미터 전후의 보석을 아주 세밀하게 고정하는 일이 주 업무인데 일의 특성상 눈의 피로가 가중되어 모두가 노안이 일찍 오거나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끼는 일이 많다.

김 회장은 이곳에서 협회조직을 뒷받침해주는 부인회조직, 어린이 토요한글학교 설립, 회원가족 일본어 교실운영, 회원자녀 장학금전달, 한국농악교실, 회원 가족 무료건강검진, 분쟁조정위원회설치, 보석전시회 등 전북 출신 세공인 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초기엔 한국인에 대한 인지도와 대우가 모두 좋지 않았고 작업환경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는 것이 오카치마치 1세대들의 한결같은 회고다.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이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2세대들에게는 희망과 꿈을 주기 이해 매년 한국 명절에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초기엔 한국인에 대한 인지도와 대우가 모두 좋지 않았고 작업환경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는 것이 오카치마치 1세대들의 한결같은 회고다.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이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2세대들에게는 희망과 꿈을 주기 이해 매년 한국 명절에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귀금속 협회건물을 구입한 것이다.

김 회장은 “형편이 어려운 때일수록 회원들 상호, 화합과 건강이 중요하다.
한국 세공인들은 점점 노령화되고 있다”며 “힘들 때 단합하는 한국인처럼 협회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이겨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그러면서 “도쿄에 전북출장소가 있으면 상호교류 등 유대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다”며 “과거에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 도쿄 전북인들이 전북도와 교류를 하려해도 못한다”고 덧붙였다.


김경진 회장은 재일한국인귀금속 협회 6대 회장을 역임했고, 재일본 도민회 부회장, 민간 도쿄지부 부의장, 재일본 한국인 귀금속 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964425@fnnews.com 김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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