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3차 세계대전도 막았다는 국제사회의 연대, 팬데믹 앞에 무너지다 [글로벌 리포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0.04 17:04

수정 2020.10.04 18:15

그동안 국제기구를 작동시킨 힘은
선진국-개도국 할것없는 양보와 타협
9·11 이후 고개든 자국우선주의
코로나 계기로 보이지 않는 국경 세워
WHO·유엔 등 유례없는 위기시대
기후·식량문제 등 결국 협력이 열쇠
"다자주의 회복해야" 목소리 확산
3차 세계대전도 막았다는 국제사회의 연대, 팬데믹 앞에 무너지다 [글로벌 리포트]

국제기구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국제기구의 균열이 강대국 스트롱맨들의 입김속에서 발생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팬데믹의 중국 책임론을 꾸준히 제기해왔으며 지난 7월 WHO가 '중국의 꼭두각시'라면서 탈퇴를 공식 통보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라 각국 정부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 치우친 WHO가 실효성이 없으며 코로나19 대응 국면에서 반복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며 탈퇴를 강행했다.


영국은 유럽연합(EU)에서 나가겠다며 브렉시트를 단행했으며 올 연말부터 영국과 EU간의 새로운 무역 기준이 설정된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런 국제기구에서 탈퇴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만큼 국제기구가 가진 힘과 영향력은 컸다. 하지만 이제 국제기구 탈퇴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처럼 느껴지게 됐다. 국제기구 이탈은 "더 이상 양보하지 않겠다", "내 나라만 챙기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제기구 탈퇴를 마냥 이기적이라고 하긴 어렵다. 국제기구 안에서도 리더십 부재나 국가 편향성, 직원들의 비리 의혹 등이 잇따르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곪아가고 있는 것이다. 국제기구는 20세기 다양한 분야의 국제 협력과 세계 평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유엔),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무역기구(WTO) 등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국제기구가 잘 작동할 수 있었던 건 선진국, 개도국 할 것 없이 어느 정도 양보와 타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전세계 양극화가 극대화되고 패권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양보 없는 경쟁이 국제기구의 균열을 부추기고 있다.

동시 다발적 균열…코로나19가 트리거


올 들어 여러 국제기구의 균열이 동시 다발적으로 드러났다. 코로나19 사태가 계기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전 세계의 눈은 WHO로 집중됐다. 하지만 WHO의 대응은 곧 비난에 휩싸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처음 보고됐음에도 중국을 옹호하는 발언을 지속적으로 내놨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이 앞장서 중국의 대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거브러여수스 총장이 중국에 매수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WHO는 날마다 화상브리핑을 열었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이나 방향성을 잡지 못했다.

또한 WHO는 최근 직원들이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에서 현지 여성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WTO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WTO에서 '대법원' 역할을 하는 상소기구는 미국의 위원 선임 반대로 지난해 12월부터 기능이 마비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 전쟁 상대국인 중국이 WTO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활용해 여러 혜택을 받았다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다가 상소 위원 임명을 보이콧했다.

게다가 지난 8월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이 임기를 1년 앞두고 갑작스럽게 중도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개인적인 사유라고 밝혔지만 미국의 등쌀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나왔었다.

WTO는 현재 새로운 사무총장 선거 절차를 진행 중이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라운드에 진출해있다.

국제기구의 대표이자 세계평화기구인 유엔 역시 흔들리고 있다. 지난달 열린 제75차 유엔총회는 그야말로 세계 국가들의 불만을 성토하는 자리가 됐다.

유엔총회는 원래 전 세계 정상, 외교수장이 모여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외교무대의 장이다. 그러나 올해 유엔총회에선 거침없는 저격과 불만 토로가 이어졌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대놓고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못 박으며 긴장감을 조성했다.

지난달 열린 이번 유엔총회는 코로나19 사태로 사상 처음 녹화분을 통한 화상으로 진행됐다.

'하나의 유럽'을 외치던 유럽연합(EU)도 영국의 탈퇴, 일명 브렉시트로 혼란을 겪고 있다.

브렉시트는 올해 1월 31일로 결정됐지만, 양측은 전환기인 올해 12월 31일까지 현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래 관계를 협상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달 런던에서 진행된 8차 협상까지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영국과 EU는 계속된 협상 결렬의 책임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달 15일을 데드라인으로 잡고, 이때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못하면 '노딜 브렉시트'를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새해 부터는 영국과 EU 사이에는 관세를 비롯한 모든 경제적 장벽이 생겨난다.

9·11 테러 이후 눈돌려…다자주의 회복해야


코로나19 사태로 수면 위에 떠올랐지만, 자국 우선주의로 회귀는 지난 20여년간 진행돼 왔다. 숙명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홍규덕 교수는 "2000년도 미국의 9·11 테러 이후 '국토안보'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며 "국가 대 비정부단체(알카에다 등)의 전쟁이 발생하며, 다시 국가가 중심이 되는 모습으로 서서히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미·중 갈등과 코로나19 사태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홍 교수는 "여러 위기 상황에서 국제기구가 더 많은 역할을 했어야 되는데 전혀 자기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국제기구 리더십의 실종이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 등 스트롱맨들의 자국 우선주의를 강화시켰다"고 말했다.

안그래도 자국 위주로 바뀌어가던 상황에서 국제기구들의 신뢰 상실은 각국의 장벽을 더욱 높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국제기구의 위기는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현재 전 세계는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어느 때보다 국제 협력과 리더십이 필요한 상황이다. 홍 교수는 "코로나19 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 식량, 각종 질병 등의 문제는 국제 사회의 협력없이 해결할 수 없다"면서 "다자주의가 활발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지난달 2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브리핑에서 "세계가 코로나19라는 국제 협력에 대한 시험에 낙제했다"고 지적하며 "국제적 대비, 협력, 단합, 연대가 결여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21세기에 적합한 글로벌 거버넌스와 다자주의에 관한 혁신적인 사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이번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국제 협력이 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었다"며 다자주의 노력을 호소했다.

imne@fnnews.com 홍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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