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이성은 경제적 합리성,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채 위세를 드날렸다. 빅토르 위고가 이성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치명타를 날린 건 이런 연유에서다. 심지어 헤겔은 역사의 행로를 '이성의 간지'라고 규정했다.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개인을 조종해 서로 싸우게 만들고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교활한 기제라는 것이다.
최근 '인간의 흑역사'를 쓴 톰 필립스는 "인간의 뇌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내지만 가게에서 포테이토칩 하나 사는 데 5분은 족히 걸린다"고 이성적 뇌의 모호함을 꼬집었다. 이성은 곧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사실로 간주하는 '확증편향'의 계곡으로 빠진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오류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음모론을 절대 설득할 수 없는 이유다. 자신이 보고 믿는 것만을 계속 확신하면서 자기 강화의 길로 매진한다.
이성의 간지가 드셀수록 감정은 배제되고 은폐된다. 감정의 밑바탕인 무의식의 광활한 바다는 잊히고 억압된다. 모든 문학적 표현에서 감정의 절제가 찬사를 받는 건 감정의 분출이 서사구조를 왜곡하거나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어서다. 소설가 박완서는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은 경제적 독립이 아닌 '감정의 독립'이라고 털어놨다. 그만큼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하기 힘든 감정의 섬세함과 어려움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감정은 우리가 늘 이성을 전제로 사회를 바라보는 습성 탓에 내면에 자리잡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이성과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구분하는 건 어렵다. 다만 과학적 이름으로 다른 것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성이 문제다. 감정이 은밀한 사적 영역에서 활개치는 것도 그런 연유다. 진짜는 물밑에 숨어 있는 빙산의 나머지 부분이다. 깊은 구조와 그 전개 과정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바로 이 부분이 행위자와 사건들을 조종한다.
특히 경제적 독립에 대한 집착은 무분별한 열정과 광기의 형태로 종종 분출한다. 최근 부동산 광풍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인의 인식 지도는 부동산으로 꽉 차 있다. 여기엔 다른 생각과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성이 마비된 집단광기의 전형적 행태다.
정신분석이 발전하면서 그나마 얻은 성과는 이성은 감정에 비해 극히 적은 부분으로 인류 역사를 지배했다는 점이다. 이성의 과잉이 감정의 빈곤을 초래하면 감정의 독립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측면은 붕괴된다.
이성의 렌즈는 나무만 개별적으로 시각화함으로써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숲을 보더라도 산을 보지 못하는 치명적 오류를 종종 저지른다. 자기확신이 강할수록 이런 경향은 도를 넘는다. 이성의 맹종에서 벗어나야 질곡의 역사가 생산의 역사로 바뀔지도 모른다.
ktitk@fnnews.com 김태경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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