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어머니의 마지막 2년을 함께한 노라, 그녀는 우리 가족의 천사"[Guideposts]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1.10 17:14

수정 2020.12.24 10:49

가이드포스트 편집위원장
릭 햄린이 지켜본
구순 노모와 간병인 노라

고관절 통증으로 일상 힘겹던 노모
자식들 설득 끝에 도움받기 시작
신중하고 친절하며 재미있는 노라는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가족
임종의 날 찾아온 그녀에게
"내 천사가 왔네"라던 어머니
노라는 또한 나의 천사이기도 했다
구순 노모를 돌본 간병인 노라(앞쪽)는 가이드포스트 편집위원장인 릭 햄린(뒷줄 오른쪽 둘째)과 그의 형제들에겐 천사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2년간 그녀는 어머니의 친절한 도우미이자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경이로운 벗이었다"고 햄린은 말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간병인 노라를 "나의 천사"라고 불렀던 햄린의 구순 노모.
구순 노모를 돌본 간병인 노라(앞쪽)는 가이드포스트 편집위원장인 릭 햄린(뒷줄 오른쪽 둘째)과 그의 형제들에겐 천사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2년간 그녀는 어머니의 친절한 도우미이자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경이로운 벗이었다"고 햄린은 말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간병인 노라를 "나의 천사"라고 불렀던 햄린의 구순 노모.
"어머니의 마지막 2년을 함께한 노라, 그녀는 우리 가족의 천사"[Guideposts]
"끊어요, 어머니. 다음주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계속 커져 가는 걱정으로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요일마다 전화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곤 하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내가 어머니를 그렇게나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고관절 때문인가. 고관절 뼈가 서로 맞닿아 부딪치면서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이태 전에 수술까지 받았는데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늘 그렇듯 단 한 번도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자기 전에 먹는 약을 주셨는데 효과가 좀 있는 것 같구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나마 보행기에 의지해 동네를 다니며 산책하던 것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쩌면 나는 최근 어머니의 긴 수면시간이 걱정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 집이 무려 4800㎞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여태껏 살고 있다. 내 형제들도 전부 그곳에서 자랐다. 지금은 다들 어머니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데 나는 그 점이 부러웠다. 불과 3㎞ 남짓 떨어진 곳에 사는 조이아 누나는 일요일마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남동생 하워드와 다이앤 형은 45분 거리에 살았지만 어머니 집에 자주 들르는 편이었다. 다이앤 형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곤 했다. 하워드의 아내인 줄리가 모시고 다닐 때도 있었다. 나는 별로 해드리는 것이 없어서 늘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내가 어머니의 전반적 건강상태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던 이유는 단지 멀리 살기 때문만은 아니고 어머니의 타고난 성격 탓도 있었다. 말도 못하게 독립적인 데다가 자기 자신은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으며, 긍정적인 것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팔십대 중반 즈음에 아버지와 함께 지은 집을 팔고 한 층에 모든 것이 있는 1층짜리 작은 집을 매수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직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앞날을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될 때를 미리 대비한 것이다.

비록 어머니는 아침에 드신 음식을 기억 못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정신만큼은 또렷하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낱말 맞히기도 하고, 독서모임 활동도 했다. 교회는 낮잠 시간과 겹치는 탓에 더 이상 다니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침대 머리맡에는 늘 '가이드포스트'가 놓여 있었다.

"어머니 댁에 좀 다녀옵시다." 나는 아내 캐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에 다녀오긴 했지만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었다. 아들딸부터 손자손녀와 증손자손녀까지, 너무 많은 식구들이 한꺼번에 모였던 까닭이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마틴 루서 킹의 날'에 쉬어요. 애들 엄마와 같이 가서 주말 내내 어머니와 보내려고요. 목요일 밤에 도착하는 비행기로 예약할 거예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서 어머니가 웃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어머니 집에 도착했다. 현관 입구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어머니가 침실에서 큰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어머니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잠시 후 우리는 자러 들어갔지만 뉴욕과의 시차 때문에 곧바로 잠들지는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조깅을 하러, 아내는 산책을 하러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계셨다. 아내는 어머니의 접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이거밖에 안 드시는 거예요? 토스트 반 조각이 전부예요?"

"조금 있다가 뭐 마실 거란다." 어머니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즉시 우리는 이것저것 요리하기 시작했다. 달걀도 하나 부치고, 전자레인지에 베이컨도 돌렸다. 이것도 어머니에게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어머니가 의자에서 몸을 돌리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고관절 통증 탓이리라. 싱크대 위에는 어머니의 약이 잘 정리돼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약을 먹기 위해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웠다. 주말 동안에는 우리가 하루 종일 식사도 차려 드리고, 약도 갖다 드리며 챙길 수 있지만 당장 월요일부터는 어떻게 하지?

"어머니." 나는 말을 꺼냈다.

"낮 시간에 어머니를 도와주실 분을 찾아야겠어요."

"음. 글쎄다."

어머니는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낱말 맞히기를 계속했다. 대화를 끝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조이아 누나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우리집 맏이인 누나는 타고난 설득가였다. 그리고 다이앤 형과도 상의했다. 어머니는 병원에 가는 일부터 시작해 의료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다이앤 형을 신뢰했다. 동생 하워드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는 병원비와 관련한 문제는 하워드를 의지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다녀간 후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이아 누나였다. 누나는 어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았을 당시 일주일간 고용했던 간병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동일한 소개소를 찾아가서 일주일에 이틀 정도 어머니를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알아볼 요량이었다.

어머니는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그럼 딱 한 시간만." 조이아 누나는 공정한 거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시 한번 설득에 나섰다. "간병인 입장도 생각해야죠. 한 시간밖에 일을 못하면 얼마나 벌 수 있겠어요?"

"그렇긴 하네." 한숨을 내쉬며 어머니가 말했다.

그렇게 간병인 노라가 어머니 집에 오게 되었다. 신중하고 친절하며 재미있고 믿음도 깊은 사람이었다. 노라는 일주일에 세 번, 오전 8시에 도착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어머니의 샤워를 도와주고, 골반에 발열패치를 붙여 주는가 하면 빨래를 하고, 약을 챙겨 주고, 설거지를 하고, 점심을 차리고, 저녁에 먹을 음식을 냉장고에 챙겨 놓는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을,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히 해치운다. 나는 노라를 급속도로 좋아하게 된 어머니가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노라 어때요?" 일요일에 어머니와 통화 중에 이렇게 물으면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우리 형제들은 문자를 주고받으며 또 다른 일을 상의했다. 노라를 조금 더 자주 부르면 어떨까? 이 제안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은 다이앤 형이었다. 어머니의 반응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런데 불과 2주도 안 되어서 어머니는 다이앤 형에게 불쑥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노라를 일주일 내내 불러야 할 것 같아. 물론 노라가 시간이 된다면 말야."

그 문제는 이렇게 일단락됐다. 그 후로 2년 동안 노라 덕분에 어머니 집은 안식처가 되었다. 독서모임에서 놀러 오기도 하고, 자식들이며 손주들이 드나들기도 하고, 우리도 가서 잠시 머무르다 오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어머니의 삶에서 가까운 존재가 됐다. 마치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그때 그 월요일,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 누워 계신 날에도 노라는 옆에 있었다. 그녀는 몹시 걱정했다. 하워드와 조이아 누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주치의 병원에 갔다가 다시 종합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그곳에서 폐렴 진단을 받았다. 올해로 아흔셋인 어머니는 진단을 받기가 무섭게 이렇게 선언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막내를 낳은 후로는 병원 신세를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무려 63년 전의 일이다.

나는 화요일에 어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수요일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그러는 동안 노라는 우리에게 문자로 기도문을 보내주었다. 목요일에는 교회 목사님이 방문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침대를 빙 둘러쌌다. 목사님은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성경 구절을 낭독했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수리 날개에 관한" 이사야 말씀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독수리 날개 위에'를 찬양했다. 그 후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주님의 집으로 갈 시간이구나."

노라는 그날 오후에 다녀갔다. 지난 2년간 어머니의 도우미이자 위안을 주는 존재였던 그녀는 이제 경이롭게도 어머니의 가장 아끼는 벗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위를 쳐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내 천사가 왔네."

천사는 바로 노라였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그 천사. 노라는 또한 나의 천사이기도 했다. 그녀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와 내 형제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어머니가 노년에 제대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내 마음이 한결 편해졌으니까. 그날 저녁, 우리가 모두 떠나고 난 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내 삶에 남긴 엄청난 부재에 여전히 적응 중이다. 하지만 비통한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노라에게 그리고 그녀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자애로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