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토픽

마약, 폭행, 총기사고에도 사랑받은 '축구의 신'.. 이제 '신의 곁으로'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1.26 08:20

수정 2020.11.26 11:14

아르헨티나의 세계적 축구선수 디에고 마라도나가 지난 1986년 6월 29일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의 승리 후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아르헨티나의 세계적 축구선수 디에고 마라도나가 지난 1986년 6월 29일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의 승리 후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파이낸셜뉴스] 아르헨티나의 국민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하늘의 별이 됐다. 국민들은 ‘신’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DIOS에 그의 등번호 10을 넣어 ‘D10S’라고 적힌 배너를 흔들어 추모하면서도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AFP 등 주요 외신들은 25일(현지시간) 일제히 마라도나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주 티그레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지난 11일 뇌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퇴원했던 터라 국민들은 더 큰 슬픔에 휩싸였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펠레와 함께 축구의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다. 펠레가 ‘축구 황제’로 불렸다면 그는 ‘축구 악동’이 어울렸다. 그라운드 안팎을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언행으로 팬들에겐 애증의 선수로 각인됐다.

그가 영웅의 자리에 오른 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5골을 넣으며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면서부터다.

잉글랜드와 8강전에서는 그 유명한 ‘신의 손’ 득점이 있었다. 비디오 판독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라 가능했다. 마라도나는 “신의 손에 의해 약간, 나머지는 머리로 넣은 골”이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겼다.

마라도나는 1960년 10월 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남 4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빈민가에서 특출난 축구 실력을 나타냈다. 이후 그는 아르헨티나 노스 주니어에 입단하며 본격 축구 인생을 시작했고, 16세에 프로 명패를 달았다. 이후 아르헨티나의 명문 보카 주니어스를 거쳐 보카 주니어스, FC 바르셀로나, SSC 나폴리, 세비야 FC 등에서 뛰었다.

그는 이탈리아 나폴리에게 188경기 출전, 81골을 선사했다. 이를 포함해 클럽에서는 491경기를 뛰고 259골을 몰아넣었다.

리오넬 메시가 마라도나에 비견되지만, 아직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다.

그는 그라운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악동이었다. 나폴리에서 뛰던 1992년에는 코카인 복용이 밝혀져 15개월 동안 자격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뛸 때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아 나중에 이탈리아 입국 때 고가의 시계와 보석을 압류당하기도 했다. 자신의 별장까지 쫓아와 취재하던 기자에게 공기총을 쏴 법정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신적인 존재다.
실제 현지에는 그를 숭배하는 마라도나교가 존재하기도 한다.


동시대의 축구 전설 펠레는 “분명히, 언젠가 하늘 위에서 우린 함께 공을 차게 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60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사진=로이터뉴스1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60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사진=로이터뉴스1


taeil0808@fnnews.com 김태일 인턴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