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 사건’ 김용남 목회자로 새 삶
[이슈추적] ‘강남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거친 놈들 아주 순한 양으로 만들고 싶어
“어렵고 힘든 사람들 보듬어 주고파”
30여년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정치
어려운 시기 있는 자가 없는 자 도와야
25세인 1975년 ‘전주파’의 두목이 되다
[이슈추적] ‘강남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거친 놈들 아주 순한 양으로 만들고 싶어
“어렵고 힘든 사람들 보듬어 주고파”
30여년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정치
어려운 시기 있는 자가 없는 자 도와야
25세인 1975년 ‘전주파’의 두목이 되다
【파이낸셜뉴스 전주=김도우 기자】 1987년 4월 야당지도자 김대중·김영삼씨는 5공 전두환 정권에 맞서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했다.
그러나 각 지구당에서 창당대회를 열 때 마다 괴청년들이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당원을 폭행하는 난동이 계속 일어난다.
이 사건 배후에는 전주파 두목 일명 ‘용팔이’ 김용남씨가 깊숙이 개입되었다.
통일민주당은 전두환 정권이 배후에 있다고 규탄했지만, 경찰은 수수방관했고 수사는 제대로 이루지지 않았다.
결국 전두환 정권이 물러난 후 서울 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 9월에서야 용팔이 등이 검거됐다.
용팔이 김용남씨는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지만, 사건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뤄지면서, 강력한 야당 출현을 막기 위해 안기부가 폭력배를 동원해 저지른 정치공작이 드러났다.
이 사건 주범 ‘용팔이’로 잘 알려진 김용남 목사(70).
조직폭력배의 보스였다가 목회자로 새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현재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강남사랑의 교회’ 담임목사다.
그의 명함에는 ‘담임목사 김용남(용팔)’이라고 적혀 있다.
여전히 자신을 용팔이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용팔이는 2002년 개신교에 귀의해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코로나 19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지낸다.
특히 그는 예전에 자신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는 비행청소년이나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화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용팔이 김용남 목사는 18일 파이낸셜 뉴스와 통화에서 “시대를 잘못 만났거나 부모를 잘못 만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많다”며 “우리가 그들을 보듬어줘야 한다. 그러면 바른 길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친구들,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자신에게 비행청소년이나 전과자 교화를 위한 역할이 더 많이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에게 현 정치상황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니 짧으면서도 강한 어투로 “요즘 건달은 의리가 없다. 정치도 의리가 없다”며 “초·중등 학생이 정치를 해도 지금보다는 낮다”고 답했다.
그는 “30여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정치”라며 “많은 사람을 보듬어 줘야 하는 데 자기 배만 채우는 정치가 되었다”며 한탄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라는 대 재앙 속에서 강한 자가 약자에게 베풀어주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도와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김용남 목사는 전주시 체육회 소속으로 역도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수많은 메달을 목에 걸었고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운동을 그만 두었다.
1950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그는 25세이던 1975년 ‘전주파’의 두목이 되었고 국내 최대 폭력조직으로 키웠다. 그가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용팔이 사건’ 때문이다.
성도들 삶의 주변만 서성이는 목회자의 어중간한 모습을 벗어 버리고 김용남 목사는 과감히 그들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 함께 춤추고 탄식한다.
몸이 불편한 성도들의 병실을 지키며 하얀 밤을 지새고 정이 그리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때로는 말씀으로 엄히 꾸짖고 때론 부등켜안고 통곡한다.
그렇게 가라 엎어진 마음위에 씨앗이 뿌려지고 황무지는 푸르름이 가득한 옥토로 변해가고 있다.
964425@fnnews.com 김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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