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영화가난다 26] <블라인드>
[파이낸셜뉴스] 예술엔 어떤 위대함이 있다. 잘 모르고 지나치던 것, 싫어하고 미워하며, 심지어는 혐오하기까지 하던 것을 어느새 받아들여 포용하게 하는 힘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이해보다는 오해와 편견과 고정관념을 학습한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옳다고 믿고 가까이한다. 반면 멀리 있는 것은 틀리고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취향이란 이름으로 저와 가까운 것만 골라 소비하도록 이끄는 SNS와 유튜브, OTT 서비스 등이 이런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예술은 온통 비슷한 것만 살아남는 무미건조한 세계의 백신이다. 저와 다른 것을 꾸준히 주입하여 다른 것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래서 성공한 예술은 수용자의 세계를 적어도 한 뼘 쯤은 넓히고 깊게 한다.
영화라는 예술이 부리는 요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개봉한 1995년, 한국에선 불륜이 곧 죄악이었다. 불륜이란 이름에서 읽히듯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윤리를 어긴 천벌 받을 행동이라 생각했다. 불륜이란 단어 안에 숨은 삶은 좀처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불륜을 소재로 삼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불편한 평가를 받았다. 불륜을 미화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조금은 달랐으리라. 순간의 사랑도 어쩌면 가족으로서의 책임만큼이나 귀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말하고 있었으므로.
각별히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사랑의 느낌이 결혼이라는 제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며, 그런 사랑은 아무리 짧은 것일지라도 가족에 대한 희생/헌신과 최소한 같은 무게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아니, "사실 사랑은 짧은 것이라야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고.
어떤 불륜은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불륜이라 욕먹는 수많은 관계 안에서도 더없이 아름다운 사랑이 싹틀 수 있음을, 불편한 진실이라 불러도 좋을 그런 이야기를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해낸 것이다. 영화를 보고 조금쯤 생각이 달라진 관객이 있을 것이다. 불륜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를 보고, 가족이 아니라 가족을 대하는 마음을 바라보게 된 이들. 그들은 영화라는 예술이 부린 요술을 제대로 겪은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 마음의 빗장을 푼다
어디 이 영화뿐일까. 불편하고, 불쾌하고, 때로는 혐오하기까지 했던 것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게 예술의 힘이니까.
2007년 제작돼 한국엔 무려 14년 만에 개봉하는 <블라인드>도 여러 미덕을 갖춘 어엿한 예술작품이다. 네덜란드 배우이자 감독인 타마르 반 덴 도프의 첫 연출작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심미적으로 탐구했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있었어'하고 들으면 불쾌하고 끔찍하게까지 여겨질 법한 이야기를 얼마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 그 특별함이 있다.
주인공은 결점이 있는 두 남녀, 루벤(요런 셀데슬라흐츠 분)과 마리아(헬리너 레인 분)다. 십대 소년 루벤은 어려서 눈이 멀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쌓인 답답함과 절망감이 가득 고여 주변 모든 것에 화를 쏟아낸다. 부유한 어머니는 사람까지 사 루벤에게 책을 읽게 한다. 어떻게든 교육을 시키려는 것이지만, 루벤은 막무가내다.
우여곡절을 거쳐 마리아가 책을 읽어주는 여자로 낙점된다. 분노로 가득찬 루벤을 강하게 억누를 수 있는 성품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마리아가 이런 성품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다. 마리아의 외양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얼굴과 몸 곳곳에 깊이 패인 상처가 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양이지만 그 나이 또래 여자에게 볼 수 있는 예쁜 구석을 찾기가 어렵다.
마리아도 제 외양을 싫어한다. 방에 들어서서는 거울부터 보이지 않게 덮어버린다. 제 외모가 언급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기괴해 보이지만 결국은 사랑
영화는 루벤과 마리아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제 결점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기괴한 영상과 연출이 이어지지만, 그 버거움을 견디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느 사랑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연달아 펼쳐진다.
<블라인드>는 결국 사랑이야기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과 작자미상의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접목해 재해석했다. 영화 속에 이들 동화를 등장시켜 서로 맞물리게 하는 대목은 제법 멋스런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튼 <눈의 여왕> 속 카이와 게르다처럼 루벤과 마리아는 제 앞에 놓인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서로의 사랑을 이루려 전력으로 질주한다. 때로는 마리아가, 때로는 루벤이 용감하게 나아가 눈의 여왕과 같이 사랑을 훼방 놓던 루벤의 어머니에게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루벤이 눈을 떠 자신의 흉측한 외모를 볼까 염려한 마리아가 그 곁을 떠나는 설정은 <신데렐라>를 연상케 한다. 루벤은 만나는 여자마다 마리아가 제게 읽어주었던 동화책 <눈의 여왕>을 읽게끔 한다. <신데렐라> 속 왕자가 신데렐라의 벗겨진 구두를 들고 제 여자를 찾아 나섰듯, 눈을 뜬 루벤이 동화책을 들고 마리아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루벤과 마리아의 사랑은 보통의 사람들에겐 익숙한 모양이 아닐지 모른다. 루벤과 마리아의 선택들 역시 버겁고 불편하게 여겨질 법한 부분이 적지 않다.
다만 <블라인드>가 이야기하는 게 사랑임은 분명하다. 서로를 아끼고 지탱하여 마침내는 제 자신보다 우선하게 되는 그런 사랑 말이다. 너무나 자기파괴적이어서 불편하게도 느껴지는 루벤과 마리아의 사랑은,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글을 읽는 이들이 하였고 하고 있고 앞으로 할 사랑들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뿌리가 같다. 피어나는 모양이 다를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괴롭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보았노라 적는다.
★★★☆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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