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의 대사 중에는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감동적이거나 뇌리에 오래 남는 것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내일의 죠'라는 일본 만화를 번안한 '도전자 허리케인'을 본 적이 있다. 그 마지막 대사인 "새하얗게 불태워 버렸어"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다. 최근 이 대사를 자주 인용한다. 대한변협회장 임기를 끝내는 소회를 묻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정말 아쉬움이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뜻으로 사용하기에 적절하다.
드물게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을 마치고 연이어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재직했다. 임기 중 5000명이 넘는 전 세계 법조계 리더들이 참석한 세계변호사협회(IBA) 정기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언제 한국에서 다시 개최될지 모르는 큰 행사가 코로나19를 피해서 열리는 행운을 누렸다. 법조계 최고위직인 대법관, 검찰총장도 추천했고, 임기 말에는 대한변협 추천 후보가 초대 공수처장에 임명되는 성과도 거두었다.
한편으론 대한민국 법조계 역사상 가장 격변의 시대 속에서 살았다. 임기 내내 사회 전체가 개혁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고, 대한변협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법원, 검찰, 경찰 개혁작업에 모두 참여하면서 어떠한 방식의 개혁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많이 고민하였다.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줄탁동시( 啄同時)이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하여 안에서 쪼는 것을 줄( )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啄)이라 하는데 이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개혁 역시 내부와 외부의 작업이 병행되어야 효과적이다. 사법부 내부의 갈등, 법무부와 검찰의 갈등, 검찰과 경찰의 갈등을 바로 옆에서, 때론 안에서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다. 내부 구성원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개혁은 반발 때문에 속도가 더디게 진행된다. 내부에만 맡겨두면 큰 변화없이 제자리 걸음이 되기 싶다. 따라서 내부의 껍질을 깨뜨리는 용기와 어미 닭 같은 애정을 가진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기와 속도가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개혁은 필연코 갈등을 동반한다. 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입체 삼각형의 바닥 면만 본 사람은 네모난 평면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반대편에서 보는 사람은 삼각형인 줄 알기 때문에 틀린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 그러나 말로만 해서는 바닥만 본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 자리를 바꾸어서 제대로 볼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공수처 역시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수사기관의 개혁이다. 내부와 외부가 긴밀히 소통하고 적절히 견제하는 조화 속에서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자리잡아 나가기를 바란다.
임기와 함께 이 칼럼난 기고도 마친다. 글은 자신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생각해서 부족한 필력이지만 단 한 번도 대필하지 않고 직접 썼다. 이제 남은 필력을 새하얗게 불태우면서 이 글을 쓴다. 그동안 두서없는 글을 좋게 봐주신 파이낸셜뉴스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일 가득하시기를 기원한다.
이찬희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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