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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김진욱 관훈포럼 참석..공수처 확고한 정체성 강조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2.25 10:43

수정 2021.02.25 10:46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사진=뉴스1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처장이 25일 오전 10시부터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관훈포럼에 참석 중이다.

현재 김 처장은 '민주공화국과 법의 지배'를 주제로 기조 발언을 한 뒤 언론인으로 구성된 패널들과 토론에 나서고 있다. 특히 김 처장은 포럼에서 공수처 1호 사건, 공수처 검사 임용 등 각종 현안에 대한 패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 처장은 기조 발언에서 "공수처는 법상 수사처검사 25인, 수사관 40인으로 수사인력이 구성되고 처장과 차장도 수사처검사의 지위를 겸한다"며 "최근 헌법재판소는 검찰청법상의 검사만이 검사가 아닌 수사처 검사도 검사로서 헌법에 규정된 영장 청구권이 있다고 결정했다"고 공수처의 확고한 정체성을 강조했다.

이어 "준사법기관이라면 헌법 7조에 따라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봉사해야 함은 물론"이라며 "헌법 103조의 정신에 따라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포럼은 총 1시간 30분가량 진행될 예정이며 KTV를 통해 생중계 중이다.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포럼은 세계적인 수준의 학자와 전문가를 초청해 연설을 듣고 대화를 나누는 행사로 2007년부터 열리고 있다.

다음은 김 처장의 기조 발언 전문

주제: 민주공화국과 법의 지배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입춘도 우수도 지나고 봄을 기다리는 오늘, 유서 깊은 관훈클럽의 초청에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사실 관훈클럽 이기홍 총무님의 초청을 받고 여러 차례 망설였습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수사처 검사와 수사관 선발을 통해 기관을 구성하는 중이고, 제가 구체적인 사건 수사에 관해 말씀드릴 입장도 아니고 해서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인지 막연한 느낌이었습니다. 관훈클럽에서도 그런 사정을 이해하시고 다만 제가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고 새로운 제도로 출발하는 공수처가 사회적인 관심의 대상인 상황에서 앞으로 공수처의 중립성, 독립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다른 수사기관과의 관계 설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이런 자리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취지의 말씀을 하셔서 오늘 이 자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몇 주 전 주말에 오랜만에 남산 성곽과 둘레길을 탐방하였습니다. 성곽이 비교적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어느 곳은 조선왕조의 태조 때, 세종 때, 숙종 때, 순조 때의 시기별로 축성된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남산에서 일제시대 통감관저의 터,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의 터, 경성신사의 터, 중앙정보부가 있던 자리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남산에서 군주국가 조선과 제국주의 일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흔적들이 서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백 년도 넘은 어느 날 남산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국가 전체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군주에게 나라 전체에 대한 처분 권한이 있다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한 조약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나라를 잃은 우리 선조들은 몇 년 뒤 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대동단결선언을 통해서입니다. 대동단결선언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순종이 일본과의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통해 주권, 인민, 영토의 삼보를 포기했으니 국민 동지들이 계승하여 이로써 군주주권의 시대가 끝나고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렸다는 선언입니다. 1919. 4. 1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 헌법은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약 백 년에 망명정부였던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로 하기로 했던 약속이 현재의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했던 약속의 이행에 백 년이 걸린 것인데 민주공화국의 약속 이행은 아직도 진행 중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는 먼저 군주국과 민주공화국에 대해, 그리고 군주국으로부터 민주공화국으로의 이행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군주국이라면 군주에게 주권이 있는 나라입니다. 주권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최고의 권력이니 이러한 권력이 왕에게 있는 나라에 사는 백성은 신민, 즉 신하된 백성입니다. 1392년 개국하여 518년 지속되었던 조선은 군사부일체의 유교 국가였습니다. 세종대왕과 같은 좋은 왕이 나와서 선정을 베풀면 누리지만 폭군이 나와서 다스려도 꼼짝없이 당해야 했던 의무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자유나 평등이 권리로써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공화국은 이런 왕의 통치를 부정하는 국가입니다. 20세기 이후 대다수의 나라들이 채택하게 된 체제입니다. 공화정 중에는 과거 로마공화정처럼 귀족 공화정 체제도 있지만, 지금은 주권이 국민 전체에게 있는 민주공화국 체제가 일반적입니다. 민주공화국에서는 국민이 자유와 평등을 권리로써 주장하고 법과 제도를 통해 관철시킬 수 있는 사회입니다. 대개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인권 존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군주국이 백성을 위한다는 민본주의 사회라면 민주공화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옴을 인정하는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군주국이 군주가 법을 통치의 수단 삼아서 통치하는 법에 의한 지배를 추구하는 사회라면 민주공화국은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고 군주조차도 법 아래 있고 법의 적용을 받는 법의 지배가 통용되는 사회입니다. 군주국에서는 형사재판이 재판기관이 수사와 소추와 재판을 모두 관장하는 규문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민주공화국에서는 소추기관이 재판기관과 분리되어 소추기관의 소추가 있어야 재판기관이 재판하는 탄핵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입니다. 군주국은 재판기관이 재판뿐만 아니라 수사와 소추도 주도하다보니 증거의 여왕이라는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공화국에서는 자백을 받기 위한 고문 등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군주국에서는 왕의 지위만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귀족과 양반의 지위, 평민과 노비의 지위 등도 대대로 세습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 체제에서는 세습과 상속을 전제로 하는 신분제도는 더이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다만 군주국에서 백성은 왕을 잘 섬기고 제도에 잘 순종하면 되지만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은 자유와 평등을 권리로써 누리는 대신 민주공화국을 민주공화국답게 만들 책임도 있습니다.

몇 백 년 동안 군주국 체제 아래 살다가 앞으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하기로 했던 결의, 민주와 공화의 나라로 만들기로 했던 약속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현재형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노력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1789년 5월 당시 프랑스 국왕이 왕실의 재정난 타개를 위한 모금의 목적으로 삼부회라는 의회를 소집한 데 대하여 제3신분의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만들어 새로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농성할 것을 서약한 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7월 14일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혁명 정부는 봉건제의 전면적 폐지를 선언하고 프랑스 인권선언을 채택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권리”가 인권이란 용어로 정착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1793년 공화국 헌법이 반포되고 공화국이 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통해 통령 정부를 조직하고 (1802년) 종신 통령이 된 뒤 1804년 황제로 즉위하여 공화국 체제가 단명하고 맙니다. 그뒤 프랑스는 입헌군주제가 되었다가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되고, 1852년 나폴레옹 3세의 황제 즉위로 다시 군주국이 되었다가 1870년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에서 패전하고 1875년 제3공화국 체제가 수립되는 등으로(1940년까지) 공화정과 군주정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오랜 역사를 반복합니다.

그만큼 군주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의 이행이 어렵고 공화국 체제를 유지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를 생각해 보면, 유럽 대륙의 한 가운데 프랑스에서 이런 혁명이 일어나 왕을 단두대에 보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자 군주제 국가들로 둘러쌓인 유럽 대륙은 큰 충격을 받았고 공화정의 확산을 우려한 주위 국가들이 체제 수호를 위해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끄는 공화국 군대는 이웃 유럽 국가들로 승승장구하며 진격했고,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말을 탄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썼습니다.

신분 해방을 이룬 공화국 군대가 진격해올 때 군주국 군대의 지휘관 귀족들은 자기 지휘를 받는 하층계급 출신 병사들이 자신들의 신분 해방을 기대하며 혹시 자기 등 뒤에서 총구를 겨누거나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화국 군대는 그럴 위험이 없었으니 수적으로 열세인 나폴레옹 군대가 초반에 승승장구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처럼 혁명을 통해 근대 입헌주의 헌법과 민주공화정을 갖게 되었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실상의 민주공화정을 이룩한 경우도 있습니다. 영국이 그런 경우인데 영국은 형식은 입헌군주제이나 실질은 민주공화정입니다.

영국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즉 대헌장을 시작으로 왕권을 제한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합니다. 대헌장은 영국에서 체계화된 법의 지배 원리의 시발점으로도 여겨지고 있는데 국왕도 법 아래에 있고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헌법 원리였습니다.

근대적인 의회제도와 대의민주주의 역시 영국에서 성장·발전합니다. 영국의 의회는 본래 왕과 신하들이 모여서 국사를 의논하는 봉신회의에서 출발하였지만 귀족과 성직자 계급 외에 주와 도시의 대표들, 그리고 평민의 대표도 의회에 소집되어 참석하면서 점차 대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후 성직자 계급의 자발적인 기권과 기사와 평민 계급의 결합이라는 사정이 더해져서 의회가 귀족원 상원과 평민원 하원으로 나뉘어 구성되는 전통이 생겼고, 의회는 왕의 자문을 하던 당초 목적에서 벗어나 왕권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1628년의 권리청원, 찰스 1세와 의회의 갈등에 따라 생긴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내전, 올리버 크롬웰의 선전에 힘입은 의회파의 승리와 공화정 선포, 크롬웰 사망 후 다시 군주정으로 되돌아간 일 등이 점철된 영국의 헌정은 1689년 의회가 제출한 권리장전을 국왕이 승인함으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명예혁명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뒤 18세기 초 독일의 하노버가 출신 조지 1세가 왕으로 부임하면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고 행정을 책임지는 의원내각제의 전통이 수립되고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적인 전통이 확립됩니다.

13세기 초 대헌장을 필두로 시작한 왕권 제한의 입헌군주제의 전통이 18세기에 와서 공화제 정부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공화정 수립을 위한 프랑스의 혁명, 영국의 개혁의 길 외에 미국이 택한 길은 영국과의 독립전쟁과 연방헌법 제정에 의한 새로운 국가 건설의 모색이었습니다. 미국은 1787년 헌법제정회의를 통해 몽테스키외의 엄격한 권력분립 이론을 헌법구조에 반영하여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는 의회(1조)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행정부(2조),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조직된 사법부(3조)를 헌법에 대등하게 배치한 연방헌법을 제정하였고, 엄격한 삼권분립을 기초로 국민의 선거로 선출되어 공화국을 이끄는 대통령 제도를 세계 최초로 고안해 냈습니다.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을 가져온 시민혁명을 말할 때 영국의 명예혁명(1688)과 미국 독립혁명(1776)과 프랑스대혁명(1789) 등을 거론하고, 그런 의미에서 독일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헌법을 갖게 된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을 무렵 프로이센에서도 혁명이 일어났고, 그 뒤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의회로 모인 대표들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독일제국 헌법(안)을 공포합니다. 그러나 프로이센 국왕은 프랑크푸르트 헌법과 황제의 제관을 거부합니다. 대신에 자신이 만든 프로이센 헌법을 공포하고 이어서 1871년 독일제국 헌법(비스마르크헌법)이 제정됩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시기에 이토 히로부미 등을 통해 독일의 헌법과 법제를 계수하여 일본제국 헌법(1889년 메이지헌법)과 법제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독일제국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제정이 붕괴되면서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하였고,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시작하는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은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던 헌법 중에서도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불릴만한 헌법이었습니다. 사회권으로 유명한 바이마르헌법은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정의의 원리가 경제질서의 원칙임을 밝힌 진보적인 헌법으로 1948년 우리나라 제헌헌법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가장 민주적인 바이마르헌법 체제 아래서 히틀러가 이끈 나치스당이 합법적으로 집권하고 세계대전까지 일으켰다는 것인데 1933년 독일 의회는 히틀러 정권에게 헌법에 구애받지 않는 법률제정권을 주는 수권법을 통과시켜 정권이 전체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밑거름을 제공하였습니다.

일본은 독일법을 중심으로 서양의 법제를 계수한 뒤 이를 우리나라에 이식시켰는데 일본이 1889년 제정한 메이지헌법과 1890년 공포한 재판소구성법 및 형사소송법은 독일법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1895년 갑오개혁에 따라 공포된 조선의 재판소구성법과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에 1899년 제정된 대한국국제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대한국이 제국이고(1조) 오백년간 전래하고 앞으로도 불변하는 전제정치(2조)로 선언한 것인데 이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로 시작하는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시작하는 1919. 4. 1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은 이러한 흐름과는 분명히 다른 선택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비록 망명정부로 시작하는 정부이지만 민주공화제의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을 수립하고자 하는 헌법의 약속을 독립운동가들이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의회 임시의정원은 종전의 “대한제국”에서 “대한”이란 이름을 나라 이름으로 쓰기로 결의하면서 “대한제국”이 비록 망한 나라이지만 이제는 “제국”이 아닌 “민국”으로, “민주공화국”으로 새로 시작함을 분명히 선언한 것입니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2조)로 시작하는바, 이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1946년 제정한 전후 헌법은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그 지위는 주권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의한다.”(1조)고 하며 천황에서부터 헌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제헌헌법은 일본 헌법보다 2년 늦게 제정되면서 일본 헌법을 많이 참고하여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에서 헌법을 시작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선언이라 할 것입니다.

1919년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을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선포한 민주공화국의 약속은 제헌헌법 2조를 통해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나라로 구체화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공화국을 우리 헌법이 약속한 것은 우리가 더이상 세습군주에 의한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헌법 7조 1항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에 종사하는 공화국의 모든 공무원들이 일부 국민이 아닌 전체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등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국가라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민주공화국에 대해서, 그 내력에 대해, 프랑스나 영국, 독일 등 주요 국가를 중심으로 일별해 보았습니다. 군주주권의 군주국가에서 국민주권의 민주공화국으로 이행하는 데에 여러 사람들의 피와 땀과 희생, 그리고 오랜 과정을 거쳤습니다.

독일의 경우 프랑스나 영국 같은 시민혁명은 없었지만 패전으로 제정이 붕괴됨으로 맞이한 가장 민주적인 헌정 체제의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취약한 체제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기까지는 독재정권의 수립과 세계대전 등의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군사부일체의 군주주권의 유교 국가 조선에서 현재의 민주공화국으로의 이행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일본의 식민지배, 그리고 해방 후의 혼란과 오랜 기간 독제 체제의 경험도 했습니다.

군주주권의 군주국이 의무 중심의 사회, 즉 의무의 주체인 신민들이 모인 사회이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민본주의 이념의 사회일 뿐이었고,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와 지배(rule by law)가 있었던 사회였습니다.

반면에 국민주권의 민주공화국은 권리 중심의 사회, 즉 권리의 주체이고 자신이 권리 주체임을 자각한 시민들이 모인 사회이고,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입니다. 과거 군주제 하의 신분제에 입각한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열린, 계층 이동이 자유스러운 개방적인 사회입니다. 아울러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은, 법과 사법제도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보장되고 자유와 평등이 법과 제도로 보장되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의미에 관해 현재의 국민주권 하에서 민주와 공화의 내용은 서로 수렴되어 공화국은 군주국가를 부정하는 내용 외에 별다른 내용이 없다는 견해와 “공화”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후자의 입장 충분히 경청 할만한 견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비록 그 형식은 서술형의 사실명제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실질은 규범명제로, 그 수범자는 우리 모두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민주공화국은 우리 모두가 만들어가야 할 과정 중에 있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A는 B이다는 식의 사실명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한다.”거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의 규범명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여 이행 과제로서의 지향점을 분명히 한 백 년 전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1조는 의미가 깊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다운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해 대한민국의 구성원 모두의 참여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근대 사법제도에 관해 1895년 갑오경장 때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된 것을 근대 사법 백 년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을 통해 근대적인 재판제도와 검찰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검찰제도는 프랑스대혁명 이래 프랑스에서 형성된 근대적인 검찰제도가 독일에 영향을 주고 일본이 프랑스와 독일의 검찰제도를 계수하여 마련한 검찰제도가 우리나라에 이식됨으로 정착된 것입니다. 해방이 된 후 1949년 검찰청법이 제정되고 1956년 검사정원법이 제정됨으로써 오늘날의 검찰제도의 토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검찰청법(4조)에 따르면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1) 범죄의 수사와 공소의 제기와 그 유지 외에 2) 법원에 대한 법령의 정당한 적용의 청구, 3) 재판집행의 지휘 감독, 4) 국가를 당사자 또는 참가인으로 하는 소송과 행정소송의 수행에 관한 지휘 감독 등을 직무권한으로 하는 형사사법기관입니다. 검사의 법적 성질에 대해서는 준사법기관이라는 견해와 사법기관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대개 준사법기관이라 보는 것 같은데 공익의 대표자로서 객관의무도 부담하는 존재입니다.

흔히들 우리나라 검찰제도에 관해 검찰의 권한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특히 고위공직자 범죄나 부패 수사에 있어서는 검찰의 수사가 공정성 논란에 휩싸인 경우가 많았고 1996년 참여연대의 입법청원으로 반부패 관련 법안이 시작된 것이 공수처 제도의 시작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수처는 법상 수사처검사 25인, 수사관 40인으로 수사인력이 구성되고 처장과 차장도 수사처검사의 지위를 겸합니다. 최근에 헌법재판소는 검찰청법상의 검사만이 검사가 아니고 수사처검사도 검사로서 헌법에 규정된 영장 청구권이 있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저희들의 정체성에 대해 판단해 주신 셈인데 검찰청법상의 검사와 같이 준사법기관이라 볼 것입니다. 준사법기관이라면 헌법 7조에 따라 (공화국 공직자의 행동준칙에 따라)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봉사해야 함은 물론이고, 헌법 103조의 정신에 따라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초청에 감사드리고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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