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 풀리테 수사로 명성
기성 정치판 깨끗이 청소
그러나 정치인 변신은 실패
스타검사가 성공 보장 못해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장관직 박차고 나온 뒤
새 정당 앙마르슈 창당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정치판 물갈이에 성공
[파이낸셜뉴스] 윤석열은 마크롱이 될까 아니면 디 피에트로가 될까. 에마뉘엘 마크롱은 프랑스 대통령이다.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는 잊혀진 이탈리아 정치인이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윤 전 검찰총장이 '별의 순간'을 잘 잡은 것 같다고 했다. '별의 순간'은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순간을 말한다. 여론은 둘로 갈렸다. 반짝론과 대세론이 충돌한다. 마크롱과 디 피에트로 사례를 통해 윤석열의 앞날을 점쳐보자.
◆디 피에트로 사례
디 피에트로는 1990년대 이탈리아의 영웅이었다.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가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선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Mani Pulite) 수사에 열광했다. 하지만 지금은 잊혀진 정치인이다.
◇90년대 이탈리아 정치판
전후 3개 정당이 권력을 분점했다. 제1당 기독교민주당은 중도우파다. 제2당 공산당은 좌파다. 제3당 사회당은 중도좌파다. 총리직은 주로 기민당이 차지했다. 사회당은 같은 좌파인 공산당보다 기민당과 더 친했다.
마니 풀리테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제1 공화국이 몰락하고 제2 공화국이 출범한다. 기존 정당이 일제히 소멸하면서 전후 이탈리아 정치를 이끌던 3당 체제가 붕괴됐다. 헌법을 바꾸지 않고 공화국 넘버링이 바뀐 이례적인 사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검사 디 피에트로'와 '정치인 디 피에트로'를 나눠서 보자.
◇검사 디 피에트로
1950년생. 이탈리아 남부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형적인 흙수저. 독일 유학 중엔 밤낮으로 일을 해서 간신히 학비를 대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야간 대학을 졸업했다. 전공은 법학. 경찰로 출발했으나 나중에 검사가 됐다.
1992년 2월 이탈리아 경제수도 밀라노의 사회당 하급간부가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게 들통났다. 중앙당은 이를 개인 범죄라며 꼬리자르기에 나섰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밀라노 간부는 이름을 줄줄 불었다.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결국 12월 베티노 크락시 사회당 당수가 자리에서 물러난다.
크락시는 거물 정치인이다. 별명은 거구라서 멧돼지다. 76년부터 93년까지 17년 동안 사회당을 이끈 권력의 화신으로, 83~87년 총리를 지냈다. 4년 재임은 당시로선 이탈리아 전후 최장 기록이다.
93년 4월 크락시가 로마 시내 호텔에서 나올 때 군중은 동전을 집어던졌다. 크락시는 사회당이 9300만달러(약 1060억원)를 뇌물로 받은 걸 인정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항변했다. 디 피에트로는 권력 실세라고 일절 봐주지 않았다.
검찰은 크락시를 기소했고, 크락시는 94년 5월 튀니지로 도망쳤다. 이탈리아 법원은 궐석재판에서 크락시에게 뇌물 2건에 총 27년 형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형량은 9년8개월로 감형이 됐으나, 2000년 사망할 때까지 크락시는 다신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93년 3월 이탈리아 최대 에너지기업 ENI에서 2억5000만달러 규모의 초대형 스캔들이 터졌다. 결국 4월 줄리아노 아마토 총리가 이끌던 사회당 내각이 총사퇴한다. 이어 실시된 국민투표(4월18일)에서 유권자들은 부패로 찌든 정치자금법을 폐지하는 데 압도적인 찬성(90.3%)을 보낸다. 이듬해 3월에 열린 총선에서 부패의 온상으로 낙인 찍힌 사회당은 전멸하고, 기민당도 참패한다. 이때 등장한 정치 신인이 바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다.
디 피에트로는 신임 총리 베를루스코니에게도 칼을 겨눈다. 하지만 언론재벌 베를루스코니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디 피에트로에게 불리한 여론이 조성됐고, 결국 그는 94년 12월 검사직을 내려놓는다.
◇정치인 디 피에트로
96년 총선에서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올리브 트리 연합(중도좌파)이 승리하자 디 피에트로는 공공건설 장관으로 입각한다. 공공건축 분야는 과거 뇌물로 찌든 곳이다. 프로디 총리는 바로 그 자리에 '부패 저승사자'를 앉혔다.
그러나 정치는 디 피에트로를 내버려두지 낳았다. 97년 검찰은 디 피에트로를 오래전 경찰·검사 시절에 있었던 일로 엮어서 올가미를 씌운다. 담당검사가, 과거 디 피에트로 검사한테 당한 사람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혐의를 벗은 디 피에트로는 97년 11월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당초 그는 마니 풀리테 인기에 편승해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정계에 발을 들인다.
디 피에트로는 98년 이탈리아가치당(IdV·Italia dei Valori)을 창당한다. 하지만 정치인 디 피에트로는 예전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2001년 총선에서 IdV는 4%를 밑도는 지지율로 의석 획득에 실패한다. 디 피에트로는 2005년 프로디 2차 내각이 출범할 때 인프라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2008년 총선에서 IdV는 4.4% 득표율로 하원 29석, 상원 14석을 차지하며 반짝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2013년 총선에선 다시 전멸하고, 디 피에트로는 당수직에서 물러난다. 2014년엔 아예 탈당해 무소속이 된다. 2018년 총선에서도 IdV는 의석수 제로다. 그렇게 디 피에트로는 이탈리아 정치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다.
◆프랑스 마크롱 사례
에마뉘엘 마크롱은 정치 천재다. 1977년 12월생으로, 2017년 5월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할 때 만으로 39세였다. 마크롱은 나폴레옹에 이어 역대 최연소 국가원수 기록을 썼다. 나폴레옹은 1804년 35세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김종인 위원장은 마크롱이 장관으로 일하다 집권당과 결별한 뒤 스스로 당을 만들어 대통령이 된 과정을 언급했다. 마크롱의 '별의 순간'을 들여다보자.
◇장관 시절 마크롱
마크롱은 프랑스 국립행정학교(ENA) 출신의 엘리트다. 2008년 ENA를 졸업한 뒤 정부에서 잠깐 일하다 투자은행 로스차일드로 직장을 옮겼다. 로스차일드에서 마크롱은 기업 인수합병(M&A)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한다. 2012년 로스차일드를 떠날 때까지 마크롱은 수백만 유로를 번 것으로 추산된다.
사회당 출신 올랑드가 대통령에 오르자 마크롱은 2012년 다시 정부로 들어간다. 엘리제궁 대통령 비서실에서 경력을 쌓은 마크롱은 2014년 8월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으로 영전한다. 이때부터 마크롱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마크롱을 알려면 마크롱법(Loi Macron), 곧 경제개혁법을 알아야 한다. 장관 재임 중 마크롱은 대놓고 친기업 정책을 추진했다. 2015년에 공포된 마크롱법은 약 300개 조항으로 구성됐고, 순차적으로 시행됐다. 가장 대표적인 게 샹젤리제 등 관광지역의 경우 1년 내내 일요일과 야간영업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마크롱은 더 강력한 '마크롱법 2'가 제동이 걸리자 올랑드 대통령에 불만을 품는다.
◇독자 노선 선택한 마크롱
2015년 8월 마크롱은 사회당을 탈당해 무소속을 선언한다. 올랑드 대통령은 마크롱의 충성심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4월엔 아예 새 정당 앙마르슈를 창당한다. 현직 장관이 보란듯이 대통령에게 대든 격이다. 이어 8월엔 장관직을 내놓고, 11월에 대권 도전을 선언한다. 이때 낸 책 '혁명'은 20만권 넘게 팔려 그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마크롱은 당내 경선에 참가하라는 사회당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마크롱의 장관직 사임을 두고 올랑드는 배신감을 표출했다. 그러나 여론은 마크롱 편이었다. 프랑스 여론조사업체 IFOP에 따르면 84%가 마크롱 사임을 지지했다. 올랑드의 배신감이 마크롱에겐 바로 '별의 순간'이었던 셈이다.
마크롱은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아무도 그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프랑스 언론은 온통 마크롱을 호평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지지율 하락에 허덕이던 올랑드는 2016년 12월 재선 불출마를 선언한다. 현직이 재선 도전 자체를 포기한 것은 올랑드가 처음이다.
2017년 4월 대선 1차 투표(23일)에서 마크롱은 24%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한다. 프랑스는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2차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2차 투표(5월7일)에서 마크롱은 66.1%를 득표해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후보를 가볍게 물리쳤다. 이어 6월 총선에서 앙마르슈는 하원 의석 308석(53%)를 차지한다. 가히 마크롱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윤석열, 제2 마크롱? 제2 디 피에트로?
'윤의 길'이 쉽지 않을 것임은 틀림없다. 척 봐도 윤석열은 마크롱보다 디 피에트로를 닮았다. 같은 검사 출신이고,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정권과 각을 세운 이력이 공통점이다. 사실 윤석열의 투쟁은 디 피에트로의 마니 풀리테에 미치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마니 풀리테는 아예 공화국을 바꿨다. 실세 중의 실세 크락시 전 총리는 망명지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생을 마쳤다. 그런데도 이탈리아 국민은 정치인 디 피에트로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지 않았다. 윤 전 총장이 깊이 숙고할 대목이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윤석열이 마크롱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여론조사가 증거다. 총장직을 내려놓자마자 지지율이 단숨에 1위로 솟구쳤다. 이재명 경기 지사가 9일 "지지율은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 속은 좀 쓰릴 게다. 마크롱은 장관직을 내던지고 창당하고 출마하는 일련의 과정을 전광석화처럼 해치웠다. 만약 윤 전 총장이 출마 결심을 굳혔다면 디 피에트로보다는 마크롱을 참고하는 게 낫다.
감히 누가 알겠는가, 하늘의 뜻을. 그저 장삼이사가 한마디 한다면, 누가 누구랑 싸우든 서민의 삶이 좀 더 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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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설명>
△마니 풀리테=1990년대 디 피에트로 검사가 주도한 부패 척결 작전을 말한다. 밀라노에서 출발해 로마 중앙정치 무대를 깨끗하게 청소했다. 공직자 5000명가량이 조사를 받았다. 의원 절반 이상을 기소했다는 통계도 있다. 그 중엔 정계의 거물 베티노 크락시 전 총리도 있다.
당시 이탈리아 정치판에선 관급공사를 두고 뇌물을 주고 받는 게 관례였다. 이렇게 오간 뇌물이 1980년대 어림잡아 40억달러(약 4조5000억원)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탄젠테폴리=탄젠테(Tangente)는 이탈리아어로 뇌물, 폴리(Polil)는 도시·마을을 뜻한다. 보통 뇌물공동체로 번역한다. 의역하면 복마전이다. 마니 풀리테와 함께 권력비리 수사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전진하는 공화국당(La Republique En Marche)=줄여서 앙마르슈(En Marche)라고 한다. 프랑스 사회당을 탈당한 마크롱이 2016년 4월에 창당했다. 당시 마크롱은 38세로 프랑스 정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프랑스 사회당=중도좌파. 전후 프랑스 정치를 우파와 양분한 핵심세력이다. 프랑스와 미테랑이 1981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다. 2012년 대선에서 프랑스와 올랑드가 정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2017년 대선에서 마크롱에게 밀리면서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총선에선 26석으로 4위에 머물렀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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