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 명동 중앙 쇼핑센터 건물 스크린에 정인 양 사진과 함께 자막이 흘러나왔다. 왜 이날이어야 했을까. 다음 날인 7일 열릴 예정이었던 재판에 밤잠을 설친 ‘정인이 엄마’들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난 7일은 서울·부산시장을 비롯해 전국 21곳에서 재보궐 선거가 진행돼 정국이 요동친 날인 동시에 정인 양을 잔인하게 폭행하고 고문한 양부모의 5차 공판일이었다. 세상의 빛을 본지 16개월 만에 정인 양 생명을 거둔 양모 장모씨와 양부 안모씨가 이날 서울남부지법 재판정에 섰다.
이 전광판 광고는 정인 양 사건에 경악하고 슬픔에 잠긴 해외 거주자들이 마련한 것이다. 정인 양을 추모하고, 재판부에 제대로 된 판결을 요구하는 취지다. 이들이 말하는 제대로 된 판결이란 양부모에 대한 엄벌이다.
이 같은 정인 양에 대한 추모 물결은 지속된다. 6일 전광판 추모와 별도로 배모씨(50)는 오는 10~14일 명동 한복판에 정인 양 얼굴을 띄운다. 사람들로부터 잊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게 배씨 의도다. 하루 최소 100회 넘게, 각 광고는 20초간 송출된다.
이뿐 아니다. 이날부터 한 달 간 16개 지하철역 377개 전광판에서 광고를 진행한다. 오는 9일부터는 목동·영등포구청·여의도·종로3가·을지로4가역 등 20개 지하철역 기둥마다 2개씩 광고를 붙여 총 40군데서 정인 양을 애도한다. 이 역시 한 달간 진행한다.
정인 양 양부모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서울남부지방법원 앞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는 이미 6일부터 정인 양이 웃고 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 13부(이상주 부장판사)는 7일 오후 살인 혐의 등으로 기소된 장씨와 아동학대 등 혐의를 받는 양부 안씨의 5차 공판기일을 실시했다.
이날 공판에선 정인 양 사망 후 검찰 측 요구로 재감정을 진행한 이정빈 가천대 의대 법의학과 석좌교수가 복부 손상 관련 감정서를 제출했다. 정인 양이 숨을 거두기 전 적어도 2번 이상 발로 밟혀 췌장이 절단됐다는 게 이 교수 판단이다.
이 교수는 “(만약 아이가 넘어졌다면) 넘어질 때 반사적으로 팔이 바닥을 짚기 때문에 췌장이 잘리거나 장간막이 파열되기 어렵다”며 “겨드랑이를 잡아 올렸다가 떨어뜨렸다고 절단이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에 그는 “머리, 얼굴, 전신에 걸쳐 멍과 발생 시기가 다른 여러 골절이 발견된다”며 “넘어지는 등으로 손상되긴 어렵고 일부는 고의적이 아니라면 생기기 어려운 손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늑골 등 골절에서 심한 동통(몸을 움직일 때 느껴지는 고통)이 생겼을 텐데 마땅한 치료 기록이 없다”며 “늑골 골절은 7번에 걸쳐 상당한 시기를 두고 이뤄졌는데 (정인 양은)심호흡이나 가래침을 뱉거나 웃거나 울기만 해도 고통스러워서 정상 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짚었다. 양부모가 정인 양의 신체적 손상을 알고도 방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손으로만 때렸다”는 장씨가 거짓 증언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판단도 내렸다. 그는 “피의자(양모)가 유방 성형수술과 겨드랑이 부유물 제거수술을 받은 상태라 팔 운동에 제한을 받은 상태”라며 “아동을 떨어뜨릴 만큼 힘이 없다는 피해자가 발로 밟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꼬집었다.
■ 해외서도 추모 물결 “정인아 미안해”
당초 배씨가 명동 전광판을 비롯해 지하철 역 광고를 기획한 것도 해외 거주자들의 지지 덕분이었다. 배씨가 꾸준히 정인 양 소식을 올린 것을 보고 그들이 먼저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을 취해왔다.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특히 산아 제한 정책이 있어 아이 한명 한명이 귀한 중국에서 많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배씨는 하나하나 번역을 해가며 그들과 소통했다. 이어 캐나다, 터키 등에서도 도와줄 방법을 물어왔다.
결국 이들은 ‘정인 양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데 생각을 모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정인 양 사진을 두자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만 5000명 넘는 인원이 힘을 보탰다는 게 배씨 설명이다. 그렇게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해외 ‘정인이 부모’들은 SNS상에서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를 진행하고 있다. 대개 ‘정인아 미안해’, ‘아동학대 반대’라는 문구를 종이에 적어든 자기 사진을 올리고 있다.
배씨는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라고 전했다. 그는 “정인이 양부가 구속되지 않은 것부터 이해되지 않는다”면서도 “그럼에도 최종 판결은 ‘상식적’이길 바란다, 그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taeil0808@fnnews.com 김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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