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마트 직원에서 늦깎이 간호사로 새 삶…"나는 하나님 계획의 일부" [Guideposts]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4.27 18:14

수정 2021.04.27 18:14

교통사고 목격 후 '제2의 인생' 폴 포클러
2007년 교회 가던 길에 사고현장 봤지만
다친 사람들 두고도 할 수 있는 것 없어
"도울 수 있었더라면…" 생각 떠나지 않아
1년 뒤인 38세에 결국 간호대학 진학
수석졸업 후 아프리카 의료선교까지
완전히 바뀐 삶, 모두 그분의 뜻이겠죠
평범한 월마트 직원이었던 폴 포클러는 지난 2007년 37세 때 겪은 교통사고를 계기로 생명을 구하는 '늦깎이 간호사'가 됐다. 그는 "그날의 사고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며 "내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고 간호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평범한 월마트 직원이었던 폴 포클러는 지난 2007년 37세 때 겪은 교통사고를 계기로 생명을 구하는 '늦깎이 간호사'가 됐다. 그는 "그날의 사고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며 "내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고 간호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겨울용 털모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시작됐다. 이상한 건 내가 그 후에 벌어진 모든 일을 그저 지켜보는 입장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도 다시는 똑같을 수 없었다.

2007년 12월 6일이었다.
부서 담당자로 일하는 월마트에서 급히 귀가했다. 그곳에서 11년째 근무한 나는 37세였고, 나중에 거기서 은퇴할 생각이었다. 대학 문턱도 밟지 못한 내가 급여가 괜찮은 직업을 가졌으니 행운이라고 생각했고, 계속 유지하고픈 마음이었다. 언제나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안전한 선택을 했다. 하나님께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그런 얘기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었다. 모험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도로에 얼음이 쌓이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의 크리스마스 퍼레이드 장식 차량 작업을 하려고 다시 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모자는 어디 있지? 아 맞다. 옷장 안에 던져 넣었지. 곧 어두워질 참이었다. 63번 고속도로는 차로 붐볐다. 400m 앞에는 인디언 크리크에 놓인 다리가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게 멈춰섰다. 앞으로 살금살금 나아갔다. 교량 직전에서 나는 보았다. 도로 오른편에 보안관보 크라운 빅이 찌그러져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표준형 픽업트럭이 있었다. 망가졌으나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분명 무시무시한 충격이었을 터다. 얼어붙은 다리였으니까.

가장 가까운 교차로에 차를 대고 순찰차로 달려갔다. 운전석 옆 유리창을 들여다보았다. 앞에 경찰 둘이 있었는데 운전석에는 남자, 조수석에는 여자가 있었다. 뒤에는 수감자 둘이 있었고, 여자와 남자였다. 모두 의식이 없었다.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더 끔찍한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한 여자가 다가왔다. "난 간호사예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여자에게 물었다. "뭘 해야 하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장비가 없으니까요. 911에 전화했어요."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운전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히 계세요." 차분하고도 확고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도와줄 사람이 오고 있어요." 내 얘기를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픽업트럭으로 다가갔다. 운전자와 그의 어린 아들은 의식이 있었지만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가만히 계세요." 반복해서 말했다. 그때쯤 응급의료대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조스 오브 라이프(사고차량에 갇힌 사람을 꺼내는 데 쓰는 공구)'를 써서 순찰차를 열었다. 그런 기술로 피해자들을 옮기고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러고 나서 모두 병원으로 향했다. 외상 치료팀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의 일은 이제 막 시작이다. 하지만 묘하게 넋이 나간 기분이었다. 아니다. 무력했다. 순찰차에 있던 누구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계속해서 교회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기에 내 차로 돌아와서 집으로 향했다. 문으로 들어섰더니 아내 멜리사가 깜짝 놀랐다. "당신, 괜찮아요?"

아내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당신은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요. 모자를 찾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 충돌사고에 있었을 수도 있어요. 죽었을 수도 있다고요. 그걸 생각해요." 저녁 먹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말없이 소파에 앉아서 모든 순간을 되새겼다.

"어머니께 전화해야겠어." 마침내 말했다. 어머니는 은퇴한 간호사니까 내가 못보고 지나친 게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폴, 네가 뭘 더 할 수 있었겠니? 넌 응급의료대원이 아니고 월마트 관리자야." 어머니는 거르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사람이다.

그날 밤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다음 날 밤에도 그랬을 거다. 뉴스 보도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보안관보는 중앙선을 넘어 미끄러졌다. 조수석에 있던 여성 로라 휘팅엄은 보안관학교 학생이었고, 재소자 수송 경찰 업무를 자진해서 맡았다. 35세였는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기혼이었고,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수감자 한 명도 사망했다. 다른 이는 모두 고비를 넘겼다. 로라 휘팅엄의 죽음이 내게 큰 타격을 안겼다. 엄마를 잃은 불쌍한 아이들. 내가 도울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살아오면서 그런 게 몇 가지 있었다. 내 일에는 심오한 목표의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4학년 때 공립학교에서 빼내어 사립학교에 등록시켰는데, 학생이 겨우 12명이고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우리 가정은 혼돈의 시기였고, 부모님은 내가 힘이 되어 주는 분위기에서 지내기를 바랐다. 여러 해 동안 나는 학년의 유일한 학생이었다. 동기 부여 때문에 고생했고, 한 해 늦게 졸업했다.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존감이 사라졌다. 갖가지 기회를 포기했다. 아프리카 선교여행이 그랬고, 내가 아주 좋아하던 공연예술 관련 직업훈련을 받는 일도 그랬다. 대학은 나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밀어붙일 상상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포기했다. 마침내 내게도 좋은 일이 생겼다. 교사인 멜리사를 만나 결혼했고, 월마트에 채용되어 승진했다. 모든 걸 제대로 해냈다.

이제는 간절히 변화를 이루고 싶었다. 응급의료대원들을 계속 생각했다. 결국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인생 후반기에 하고 싶은 일이니? 심하게 망가진 차에 드나드는 일이? 간호학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떠니?" "뭐라고요? 내가 대학에 가지 않은 걸 아시잖아요." "못하겠다면 권하지 않아, 폴." 어머니가 반박했다. "너 자신을 믿고 몸을 사리는 걸 그만둬야 해." 얘기했듯이, 어머니는 단도직입적이다.

대학? 간호학과? 모두 과해 보였다. 하지만 내면의 느낌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간호학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나는 인가받은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으므로 우선 고졸 학력 인증서를 따고 대학 입학 학력고사를 치러야 했다.

"포기하면 안 돼요. 당신 공부를 도울게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 얘기하려고 애쓰시는 중이고,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봤어요?" 멜리사가 말했다. 아내가 날 믿고 어머니도 그렇다면 내가 왜 그러지 못하겠는가?

2008년 8월에 대학 생활을 시작했고, 2년 후에는 간호학 과정에 입학했다. 비용을 보태려고 월마트에서 계속 시간제로 일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100만배는 더 힘들었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가 날 계속 나아가게 했다. 로라 휘팅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었더라면. 로라도 꿈을 가진 학생이었다. 가끔 로라의 가족과 연락하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부진했지만, 로라와 내가 느꼈던 무력감은 절대 잊지 않았다.

2012년에 정확히 수석으로 졸업했다. 등록 간호사라니! 그래도 배운 걸 내가 계속 기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모든 세부사항은 절대 기억할 수 없어. 간호는 복잡하니까. 간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어머니의 얘기였다. 내가 간호 업무에 뛰어나다는 걸 알고는 놀랐다. 나는 공포와 걱정을 알았다. 하나님께 의문을 가지는 사람을 이해했다. 환자와 생각을 나누면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영향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감비아로 의료선교여행을 떠났다. 어른과 아이를 아울러 그곳 사람들을 간호한 일은 내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서 날 기다리고 계셨던 듯했다. 그분께서 내 삶을 위해 마련하신 계획을 내가 받아들이기를 애정을 기울여 기다리고 계셨다. 한때는 의심했으나 이제는 포용하게 된 계획이었다.

매일 운전해서 병원으로 출근하다 보면 로라의 추모공간에 세운 소박한 나무 십자가로 된 기념물을 지나쳤다. 로라의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홀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고, 모든 일의 결과로 내 삶이 바뀌었다고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2017년 6월 어느 토요일에 우리 부부는 시내로 쇼핑을 나섰다. 예기치 못하게 지연되는 일이 계속 일어나는 바람에 굉장히 늦었다. 그 다리에 이르기 전, 반사적으로 기념물을 힐끗 보았다. 젊은 여성 둘이 십자가 근처에 서 있었다. "그 아이들이야."

9년도 더 전에 차를 세웠던 그 옆길에 차를 댔다. 아내와 함께 둘이 서 있는 작은 십자가로 걸어가서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로라와 관계가 있나요?" "네. 우리는 엄마의 쌍둥이 딸이에요." 둘 중 하나가 대답했다.

"나는 사고가 있던 밤에 멈춰 섰어요.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이들과 내내 거기 있었죠. 그들은 절대 혼자가 아니었어요. 그날이 내 삶을 바꿨고요. 나는 대학에 진학해서 간호사가 되었답니다. 로라의 가족에게 그 비극에서도 좋은 일이 생겼다고 늘 얘기하고 싶었어요."

두 딸, 한나와 헤일리가 날 바라보았다.

"이건 하나님의 순간이네요. 오클라호마주에서 자라서 엄마의 추모공간에 온 건 처음이에요." 헤일리가 말했다.

"의미심장하네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올 걸 아셨나요?" 한나가 덧붙였다.

"몰랐어요. 아내와 나는 오늘 시내에 가기로 했거든요.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생각해보니 계획의 일부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후원문의 (02)362-4000

글·사진=가이드포스트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