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승어부' 다짐
존경받는 기업 첫걸음
존경받는 기업 첫걸음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족들이 12조원이 넘는 상속세를 내기로 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최고 액수다. 유족들은 또 별도로 1조원을 의료사업에 기부하고, 국보·보물급 문화재와 국내외 유명 미술품 등 총 2만3000여점을 공공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말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최후진술에서 '승어부'를 말하며 "모든 국민들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28일 사회공헌·상속세 발표는 그 첫걸음으로 평가된다.
우리는 특히 상속세 성실납부에 주목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5월 대국민 사과에서 "저와 삼성은 승계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질책을 받았다. 특히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 건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상속세 12조원 납부는 그동안 승계를 놓고 빚어진 온갖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물산 주식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 부회장 등 상속인은 이달 30일까지 1차분 상속세를 내야 한다. 세금 규모가 워낙 큰 탓에 향후 6년에 걸쳐 6차례로 나눠내는 연부연납 방식을 택했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정부와 정치권이 재벌 가업승계 방식에서 개선점을 찾아볼 것을 제안한다. 특정 재벌에 특혜를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희 회장이 남긴 재산은 현행 상속증여세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다만 최고 65%에 이르는 세율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수차례 "자식들에게 경영권 대물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카오의 김범수 이사회 의장,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의 김봉진 의장은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는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에 가입했다. 하지만 세율 65%는 이들이 넘지 못할 벽이다. 좋은 일에 돈을 쓰고 싶어도 세금 무서워서 포기한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국에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다.
상속증여세법상 공익재단에 주식을 넘겨도 지분 5%에 대해서만 면세 혜택을 준다. 이 5% 룰을 완화하면 한국에서도 스웨덴 발렌베리재단과 같은 공익법인이 나올 수 있다. 100년 역사를 가진 발렌베리재단은 단 하나가 아니다. 공식 홈페이지엔 12개의 재단이 소개돼 있다. 후손들이 자기 이름을 딴 재단을 경쟁적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스웨덴 정부는 일회성 상속세 징수보다 재단을 통한 부의 승계가 공동체에 더 이익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우리도 대기업에 발렌베리식 기회를 줄 순 없을까. 이러면 의료, 교육, 보육 혜택이 공동체에 두루, 지속적으로 돌아간다. 소유와 경영도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정부와 정치권이 재벌을 보는 낡은 시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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