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로 찾아온 위기 이겨낸 레이린 니켈
남편이 죽고 홀로 목장을 꾸린지 7년
코로나로 이웃과 교류가 끊긴 것은
고독이 익숙한 내게도 고통이었다
"남편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조금은 무모한 기도를 올렸다
어느날 방에서 찾은 종이뭉치
남편이 나 몰래 써놓은 글들이었다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했지만
그안엔 그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남편이 죽고 홀로 목장을 꾸린지 7년
코로나로 이웃과 교류가 끊긴 것은
고독이 익숙한 내게도 고통이었다
"남편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조금은 무모한 기도를 올렸다
어느날 방에서 찾은 종이뭉치
남편이 나 몰래 써놓은 글들이었다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했지만
그안엔 그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혼자 지내는 데 아주 익숙한 나 같은 사람이라면 고독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다. 7년 전에 남편 존이 암으로 세상을 뜬 이후, 노스다코타 대초원에서 1.9㎢에 이르는 목장을 운영하고 소 떼를 꾸리는 일을 스스로 해왔다. 고독하게, 고요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웃, 공동체, 몇 년에 걸쳐 일군 협동 경작 조직과 강제로 떨어져 지내다 보니 나도 한계에 다다랐다. 나는 67세인데 이렇게까지 혼자인 적은 없었다.
부활절 나흘 전인 성(聖)목요일이었다. 남편과 나눈 친밀함, 그의 강인한 힘과 냉철한 지혜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주님, 제발 남편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아침 기도 시간에 크게 소리 내서 말했다. 이례적으로 배짱 넘치는 기도였다. 보통 나는 하나님의 고유한 소통방식에 만족한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기쁨이나 적막 속에서 섬광처럼 떠오르는 통찰력 같은 것이었다. 근 30년에 달하는 결혼생활 동안 나눴던 수많은 긴 대화 속에서 존이 했던 얘기가 떠오를 때도 있다.
무언가를 좀 더 직접적으로 부탁드리는 건 주제넘은 일이었을까. 성주간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마저도 들어주실 거라면 지금이 그때였다.
나와 존의 동반자 관계는 친밀했고 생애 이 시기에 혼자 지내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우리는 아이가 없었다. 목장 일이 평생과업이었고 매일 고독과 연대, 고요와 대화가 갈마드는 신실한 리듬에 맞춰 일했다.
존은 꾸준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신중하게 결정하고 계획과 목표를 자세히 썼다. 모든 면에서 견해를 고려해서 균형 잡힌 관점에 도달했다. 나는 지금 그런 균형이 필요했다. 뉴스는 팬데믹의 심각성, 격리의 중요성, 정부의 올바른 대응을 두고 상충하는 의견으로 가득했다. 내 나이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운영해야 하는 목장이 있었고 이웃의 도움 없이는 해낼 수 없었다.
남편이 세상을 뜬 후, 함께 일하거나 그저 만나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다. 언제나 기다려지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고독을 견딜 수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이따금 하는 포옹만큼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두 젊은 친구 줄리아와 미렉은 정말이지 뛰어난 포옹꾼이었다. 둘은 인근 애너무스에 개업한 농장 직거래 레스토랑 겸 출장요리 사업체인 '팜타스틱(Farm-tastic·환상적이라는 뜻의 fantastic을 이용한 이름) 헤리티지 푸드 허브'를 가지고 있었다. 줄리아와 미렉은 지역에서 재배하고 준비한 음식을 판매했는데, 거기에는 내 목장에서 풀을 먹여 키운 소고기도 있었다.
가능한 한 자주 그들을 방문하려고 애썼다. 지역 농부들을 위한 판로가 된 둘의 사업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줄리아의 샐러드와 디저트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환대를 훨씬 더 좋아했다. 레스토랑은 옛 우체국에 들어섰는데, 줄리아와 미렉이 구제해주기 전까지는 텅 비어서 철거 딱지가 붙어 있던 곳이다.
이제는 그 레스토랑도 문을 닫았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다음에 방문했을 때 친구들을 안아볼 수 있을까.
동네 다른 친구들에 대해서도 같은 점이 궁금했다. 여기 노스다코타에서는 커피 마시러 잠시 들르는 일이 주된 사교시간이다. 언제 그걸 다시 누릴 수 있을까.
카렌 언니도 찾아갈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언니는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걸 걱정했고, 내가 농장을 운영하느라 다른 이들과 접촉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는 만나서 커피 한잔하는 걸 하지 말자고 서로 동의했다.
그리고 토니와 샘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목장의 양옆에 사는 이웃으로 30대의 젊은이였으며 이제 막 가족을 꾸리기 시작했다. 샘은 그가 열일곱 살 때 우리 부부가 이끌던 교회 청년부 부원이었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는 이제 결혼도 했고 자기 사업체를 구축하는 중이었다.
기업형 농업 합병의 시기에 독립적인 농부로서 사는 일은 만만치 않다. 나는 토니와 샘이 우리 부부가 소유한 0.3㎢의 땅에서 소 떼를 방목하게끔 허락했다.
샘과 토니는 이따금 내 목장 일을 도와주었다. 어떤 일은 내 체력에 부치는 힘이 필요했고, 나는 두 사람을 '목장 협력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아픈 송아지를 치료하고 고집 센 소를 트레일러에 밀어 넣으며 무거운 짐을 나르느라 힘을 합쳐 일했다. 그러고 나서는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거나 밖으로 나섰다.
적어도 전에는 그랬다. 샘과 토니는 여전히 도와주려고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는 거리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웃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포기해야 할까.
"존, 당신 어디예요?"
식당에 있는 존의 빈 의자에 대고 물었다. 남편은 종종 거기에 앉아서 서류작업을 했고 그저 생각에 잠기거나 기도하거나 했다.
그날은 종일 혹시 남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해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들리는 건 바람소리뿐이었다.
성금요일이 되자 외로움이 더 깊어졌다. "하나님께 만족하지 못했던 일을 용서해 주세요."
그날 아침 하나님께 기도했다. 여전히 그 전날 존의 목소리를 들려달라던 배짱 넘치는 기도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식당 창문 옆에 있는 내 기도 자리에 앉았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읽으려고 성경에 손을 뻗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2013년 5월 1일에 쓴 일기를 펼쳤다. 그날은 존이 수술을 받았고 나도 병원에 있었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고 대기실 벽에는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상이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존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면서 일기에 썼다. 남편은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일기장을 덮고 추억은 제쳐둔 뒤, 밖으로 나가서 그날 할 일을 했다. 염소들에게 건초를 던져주고 송아지들에게 물을 먹였다. 소와 말도 확인했다. 가축이 함께 있어도 고독을 달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계단을 올라 내 사무실로 향했다. 농업 간행물에 기고할 기사를 쓰면서 목장 수입을 보충하는 곳이었다. 존이 그의 책상을 둔 방을 지나가다가 웬일인지 책상 위에 있던 길이 60㎝의 투박한 십자가가 뒤집어진 채 떨어진 걸 보았다. 십자가를 제자리에 두려고 방에 들어갔다.
바닥에 종이 몇 장이 있는 걸 알아차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방을 속속들이 알았지만, 전에는 종이가 거기에 없었다. 종이를 주워서 다시 책상에 올려두었다. 예전에 존이 작성한 소 떼 관리 예산의 일부였다.
바로 그때 책상 옆, 바닥에 놓인 작은 상자 위에서 또 다른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최근에 그 방에 있는 벽장을 치우고 상자를 마룻바닥에 두었다. 하지만 거기에 종이를 둔 기억은 없었다. 노란 종이 6장은 존이 갈겨쓴 글씨로 가득했다.
이 집에는 목장 관련 기록이 빼곡하다. 왜 그걸 전부 모아두었지? 하지만 잠깐! 이것들은 비용 기록이 아니었다. 무엇인가에 관한 존의 생각을 담은 짧은 글들이었다.
아래층 식당으로 달려 내려가서 탁자에 종이를 늘어놓고 존의 글씨를 판독했다. 남편의 글씨는 한 번도 읽기 쉬웠던 적이 없다.
종이뭉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한참 전에 우리는 존이 지방신문에 주간 칼럼을 기고하는 걸 심사숙고한 적이 있다. 분명 남편은 연습 삼아 칼럼을 몇 편 썼지만 내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남편은 제대로 써서 만족한 다음에야 글을 공유했을 터다.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남편이 남긴 추억을 눈앞에 펼쳐두고 탁자에 앉았다. 존은 여느 때와 같이 자조적인 투로 글을 썼다. 문제에 접근하고 희망적인 결론에 다가가는 동안 절대적인 판단에서 한발짝 물러서는 완곡한 방식이었다. 칼럼 중 하나는 우리가 목장 주변에서 하던 산책을 언급했다.
"우리는 이야기하고 방문하고 토론한다." 남편은 이렇게 썼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다른 칼럼에서는 '크고 오래가는 역경'을 시험해보는 성격을 논했다.
'계속해 봐요, 레이린.' 존이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남편은 칼럼마다 '붉은 잎사귀' 서명을 남겼다. 분명 남편이 캐나다 출신이라는 증거였다. 존은 캐나다 중부 매니토바에서 태어났고, 우리는 내가 젊어서 캐나다의 대목장에서 일하던 시절에 만났다.
더 많이 읽을수록 더 평온해졌다. 교회력에서 가장 암담한 날에 우연히 발견한 이 종이에는 내가 간절히 듣고 싶어 하던 목소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방식으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리고 그 대답 속에서 나는 경작을 하고 북부 평원의 고된 환경에서 생활하느라 끝없이 이어진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던 모든 때를 떠올렸다.
나는 혼자다. 그렇다. 홀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또한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계셨다. 농부로서 쌓아온 나의 오랜 경험과 남편의 지혜도 여기 있었다. 나는 지금도 삶과 일에서 남편의 지혜를 실천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서에서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그것을 믿는다. 사랑과 은혜가 있는 미래. 다시 새로워진 생활. 언니와 마시는 커피와 이웃과 나누는 대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그 무엇도 뻔뻔하거나 과하지 않으며, 나는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희망을 믿는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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