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검찰·법원

‘北 부역자’로 몰려 무기징역 확정.. 70여년 만에 깨졌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5.16 09:00

수정 2021.05.16 09:31

체포된 뒤 두 달만에 '무기징역' 확정
이 과정서 아들과 생이별한 김 할머니
사연 알려지며 43만에 모자 상봉
아들 노력 끝에 2019년 재심 결정
71년만에 뒤바뀐 판단..사실상 무죄
1994년 11월 고(故) 김복연 할머니의 아들 전철수씨가 재심을 신청하면서 당시 대통령민정비서실에 보낸 청원서 중 일부. 사진=장경욱 법무법인 상록 변호사
1994년 11월 고(故) 김복연 할머니의 아들 전철수씨가 재심을 신청하면서 당시 대통령민정비서실에 보낸 청원서 중 일부. 사진=장경욱 법무법인 상록 변호사
[파이낸셜뉴스] “5살 때 1950년 전시 혼란기를 틈타 국가공무원들이 사리사욕의 탐욕으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로 인해 한 가정을 파괴시켜 생이별을 당한 것을 43년만에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1994년 11월 전학철씨의 대통령민정비서실 청원서 中)
1950년 10월 서울이 수복된 뒤 피난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전씨 가족을 맞이한 건 악몽이었다. 전씨의 어머니 고(故) 김복연 할머니는 서울 종로구 원남동 거리에서 급작스레 검거됐다. ‘범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자가 함께 구타를 당한 뒤 사직공원으로 끌려갔다.
총살의 위기가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긴급령’으로 총살을 겨우 면한 뒤 종로경찰서로 이송됐다. 당시 전씨의 나이는 5살에 불과했다.

전씨와 김 할머니가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 간 건 1950년 7월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을 당시 인민군에게 ‘이승만 대통령 돌아오시라’란 삐라를 제작한 사람들을 밀고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사는 가혹하게 진행됐다. 김 할머니는 혐의를 계속 부인했지만, 경찰들의 ‘고문행위’가 이어졌다. 그 상황을 본 5살배기 전씨가 울음을 터뜨리자 경찰은 아무런 동의 없이 ‘전쟁고아 수용소’로 전씨를 보냈다. 당시 이름은 경찰이 마음대로 정한 ‘맹철수’였다. 전씨는 꽤 오랜 기간을 이 이름으로 살았다.

조사와 기소, 판결까지도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검사는 1950년 11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체포부터 기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9일이었다. 기소된 김 할머니는 한 달도 안 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당시 단심제였던 탓에 판결이 확정됐다. 옥살이 중 병세로 풀려나고 다시 붙잡히길 반복하다 지난 1973년 15년으로 감형되면서 만기 출소했다.

전쟁고아 수용소로 보내졌던 전씨가 어머니 소식을 알게 된 건 1993년 7월이었다. 방송과 신문 등 언론을 통해 김 할머니의 사연이 알려지면서다. 이를 통해 김 할머니는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아 아들과 헤어진 지 43년 만에 극적으로 아들과 상봉했다.

이후 전씨는 당시 김 할머니에게 적용된 혐의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50년 7월 인민군에 쫓기던 김 할머니가 국군 일병 김모씨를 숨겨주고 옷을 줬는데, 이를 한 집에 살던 세입자들이 인민군에 신고했고, 할머니 모자는 피난을 떠나게 됐다. 이후 세입자들은 할머니가 서울로 돌아오자 허위 사실이 들통 날까 두려워 김 할머니를 부역자로 만든 것이다.

전씨가 과거 재심을 준비하며 수집한 증거들의 목록. /사진=장경욱 변호사
전씨가 과거 재심을 준비하며 수집한 증거들의 목록. /사진=장경욱 변호사
■아들의 고군분투로 결정된 2번째 재심
전씨는 이후 사건을 바로 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정부합동민원실과 서울지방검찰청,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을 돌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과천정부청사와 서울지방국세청, 서울시청, 종로구청 등을 돌며 증거를 차곡차곡 모았다. 전씨 손으로 직접 재심청구서를 작성했다. 청구서를 내면서 당시 대통령민정비서실에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1994년 청구한 첫 번째 재심은 기각됐다. 전씨는 2년 뒤 ‘재심기각 결정에 대한 즉시항고’를 하면서 호소문도 보냈다. 전씨는 호소문에서 “명백한 인권침해가 있었지만, 피고인(김 할머니)을 무기징역에 처한 확정판결은 무효이며 무죄 판결을 구한다”고 했다. 이후 1997년 당시 서울지검에 진정도 넣었지만, 검찰은 ‘공소시효 완성’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했다.

그러던 2017년 전씨는 재차 재심을 청구했다. △경찰이 발부한 구속영장에 의해 구금 △고문 가혹행위와 직권남용죄 등 형법 위반 사항이 명백히 있고,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2년 여 심리 끝에 재심이 결정됐지만, 1950년 당시 김 할머니를 체포한 경찰의 불법체포와 감금죄는 인정됐지만 고문 가혹행위와 직권남용은 인정되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201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70여년 만에 뒤바뀐 판결..사실상 ‘무죄’
법원은 70여년 만에 판단을 뒤집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3부(박사랑·권성수·박정제 부장판사)는 지난 14일 '비상사태 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김 할머니의 재심에서 ‘면소’ 판결을 내렸다. 면소는 형사소송에서 소송절차를 종결하는 판결로, 공소시효가 완성됐거나 범죄 후 법령이 없어져 형이 폐지됐을 때 등 면소 판결이 나온다.

재판부는 “김 할머니가 국군 한 명을 구해줬다는 이유로 피난을 갔고 1950년 공소사실 당시 범행현장에 없었다는 진술은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있다”며 “이 사건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김 할머니를 부역자로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어 “특조령이 위반일 경우 다른 법령으로 차단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면소 등 조치를 취하는 게 현재 판례”라며 “헌법 원칙에 위배된다고 볼 여지는 있지만, 국회 승인을 얻는 등 절차와 요건을 갖췄다고 판단돼 법령 자체가 위헌·무효라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이에 따라 무죄를 선고해야 할 사안으로 볼 수 없다”며 “다만 특조령이 위헌·무효 판단되지 않아 면소 판결을 선고한다”고 설명했다.

jihwan@fnnews.com 김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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